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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강증흠(姜曾欽)은 강기룡(姜起龍)의 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를 모심에 그 직분을 다하니 인근 마을에서 그의 효행을 기려 여러 차례 상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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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영대(權寧大)[1885~1946]는 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鎭東面) 고현(古縣)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의거’를 주도하였다. 서울의 3·1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국권 회복단’의 단원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변상섭(卞相攝), 권영조(權寧祚), 권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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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태선(權泰璿)[1891~1962]은 3·1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국권 회복단’ 단원인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영대(權寧大), 변상섭(卞相攝), 백승인(白承仁) 등과 함께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3개 면(面) 연합 시위를 계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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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가덕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김근도(金根道)[1900~1983]는 1918년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법랑직공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제의 한국 통치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김근도는 민족의 해방만이 조국이 번영할 길임을 자각하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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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두석(金斗石)[1915~2004]은 1939년 7월 20일 마산(馬山)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신사 참배(神社參拜)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교사직에서 해임 당하였다. 1940년 5월 17일부터 1941년 7월 30일까지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에 대한 거부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다가 5회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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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 김병길(金秉吉)[1924~2019]은 1943년 경남 진해의 일본 해군 제51 항공창(海軍第51航空廠)에서 군속(軍屬)으로 근무하면서 김차형(金此炯), 최연종(崔演鍾), 박준기(朴準基) 등과 함께 독립 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 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였다. 일심회는 한국인 노동자와 기술자의 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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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병화(金炳和)[1900~1946]는 창원군 웅동면(熊東面)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의 제의로 인근 웅천면(熊川面)의 문석주(文碩柱), 정운조(鄭雲祚)와 함께 1919년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김병화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2천여 장을 등사하고 태극기 600여장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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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김산은 김해(金海) 김씨로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호는 시락재(時樂齋)이며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살이를 6년 동안 하였는데 너무 애통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더니 묘(墓) 주변의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만년(晩年)에 고성(古城) 아래 정자(亭子)를 짓고 ‘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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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출신의 체육인[씨름]. 김성률(金成律)[1948~2004]은 경남 마산 성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와 씨름, 레슬링 등에서 전국 대회를 석권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마산 중학교 재학 때는 축구를 하였으나 마산 상업 고등학교[지금의 용마 고등학교] 때 다시 씨름부에 들어가 전국 체육 대회 씨름 부문에서 2연패를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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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김성환(金成煥)은 선산(善山) 사람으로 수사(水使) 김치형(金致亨)의 후손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가 병이 깊자 대변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으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마을의 선비들이 그의 효행을 기려 포상(襃賞)을 청(請)하였다. 진사(進士) 허채(許採)가 시문(詩文)을 지어 그의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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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三鎭) 의거에 참여했다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수동(金守東)[1877~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가 대한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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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교구 초대교구장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천주교 추기경. 김수환(金壽煥)[1922~2009]은 천주교 서울 대교구의 소신학교인 동성 상업 학교[현 동성 고등학교]를 마치고 1941년 4월 대구 교구의 장학생이 되어 일본 상지 대학교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상지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친일 성향의 일부 조선인 유학생과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부 교수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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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감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시주(金時州)[1921~1968]는 동삼성(東三省) 하얼빈[哈爾濱]과 심양(瀋陽)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40년 12월에 귀국하여 경남 마산(馬山)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김시주는 마산의 청년들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역설하면서 항일 선전물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94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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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일성(金逸成)[1901~1952]은 1919년 웅동면 마천리(馬川里)의 주기용(朱基溶), 배종인(裵鍾仁), 배건수(裵建守) 등과 주도하여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김일성은 마천리(馬川里)의 문석주(文碩柱), 정운조(鄭雲祚), 김병화(金炳和)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태극기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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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 운동가. 김잠진(金蠶鎭)[1915~1955]은 창원군 웅동면(熊東面)에서 조맹규(曺孟奎), 조원갑(曺元甲), 이승종(李承鍾), 박남성(朴南誠), 백태식(白泰植)과 함께 ‘웅동 적색 농민 조합(熊東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고 농민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3월까지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 강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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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김제주(金濟周)[?~?]의 초명(初名)은 하정(夏鼎)이며, 김무조(金武祚)의 증손자이다. 부모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시력을 잃을 뻔하자 여러 가지 약초를 구하여 지극 정성으로 탕약을 만들어 봉양하니 시력을 회복하였다. 마을의 선비들이 감동하여 그 효행을 기록하여 관청(官廳)에 고하니 관청(官廳)에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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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 김차형(金此炯)[1924~?]은 1943년 경상남도 진해의 일본군 제51 해군 항공창(第51海軍航空廠)에서 군속(軍屬)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민족차별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김차형은 김병길(金秉吉), 최연종(崔演鍾) 등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였다. 일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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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김학규(金學圭)[?~?]는 김주(金澍)의 후손으로 호는 죽암(竹菴)이다. 아버지가 병이 깊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매우 애통한 나머지 몸을 상하여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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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김호현(金浩鉉)[189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이 연합한 삼진(三鎭) 의거에 참여하였다. 거사 당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세워진 태극기 아래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대동 청년단’의 변상태가 대한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어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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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삼형제. 김희광(金喜光)·김희철·김희현 삼형제는 어머니를 봉양함에 삼형제가 함께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으며, 서로 번갈아가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병세를 호전시켰다. 어머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향도(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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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감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맹근(文孟根)[1914~1967]은 경상남도 진해시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김상복(金相福), 박영수(朴永守), 박홍목(朴弘穆) 등과 함께 비밀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독서회를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항일 운동을 하다가 김상복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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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문석윤(文錫胤)[1879~1913]은 1904년 경상남도 진해 웅천현의 향장(鄕長)이 되었다. 1904년 일제가 가덕도에 육군 포병대를 설치한 것을 보고 반일(反日)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문석윤은 현대적 교육을 통해 민족적 역량을 높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자 다짐하였다. 현대적 지식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마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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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석주(文錫柱)[1899~1934]는 1919년 4월 3일에 경남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마천리(馬川里)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거사를 도모하던 중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 웅천의 독립 만세 운동은 계광 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의 제의하고 문석주, 김병화(金炳和), 정운조(鄭雲祚) 등이 참가 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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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남성(朴南誠)[1912~1972]은 1932년 창원시 진해구 웅동면(熊東面)에서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과학 사상 강좌를 열고 현재의 사회 제도를 개혁해야만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박남성은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33년 5월 김잠진(金蠶鎭), 백태식(白泰植) 등과 함께 비밀 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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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노일(朴魯一)[1894~1963]은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 장날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인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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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성 정치가.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부산 동래 여자 고등학교 전신인 부산진 일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馬山) 최초의 여학교인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2월 이갑성을 만나 3월에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거사가 있을 것임을 전해 듣고 마산의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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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수(朴永守)[1914~1950]는 경상남도 진해에서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야학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9월부터 김상복(金相福), 박홍목(朴弘穆) 등과 함께 진해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비밀 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였다. 박영수는 독서회 활동을 통해 식민지 지배 체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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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홍목(朴弘穆)[1914~1971]은 1931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이동리(泥洞里) 사립 야학교에서 김상복(金相福), 박영수(朴永守), 문맹근(文孟根)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이동 독서회 동맹 구락부(泥洞讀書會同盟俱樂部)’를 조직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독립 운동을 하였다. 박홍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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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진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상권(裵祥權)[1915~1942]은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에 정착하였다. 연구소 급사, 백화점 취사부, 우체국 집배원, 세탁소 직원, 신문 배달원 등의 일을 하면서 즙합 상공 실수학교(葺合商工實修學校)에서 공부하다가 사립 학교 북신 상업학교(北神商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38년 하순 같은 학교에 유학 중이던 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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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재황(裵齋晃)[1895~1966]은 경상남도 진해의 개통 학교와 계광 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 청년학교 중학과를 졸업하였다. 주시경(周時經)의 한글학교에서 국어학을 공부하였으며, 19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계광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승복(僧服)으로 혹은 노동자 차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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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배종인(裵鍾仁)[1901~1965]은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熊東面)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계광 학교 교사 주기용(朱基瑢), 동지 정운조(鄭雲祚), 문석주(文錫柱), 김병화(金柄和)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우고 군중 동원에 총력을 다했다. 거사 당일, 이른 아침부터 마천리(馬川里) 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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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승인(白承仁)[1899~1970]은 1919년 3월 28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고현(古懸)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三鎭義擧)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영대(權寧大), 변상섭(卞相攝), 변상헌(卞相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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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백태식(白泰植)[1915~1965]은 1931년 12월 창원군 웅동면(熊東面)에서 항일 동지들과 함께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상을 선전하는 사회 과학 강좌를 열었다. 1933년 5월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동지 조맹규, 조원갑, 박남성, 김잠진 등 54명과 함께 비밀 결사 ‘웅동 적색 농민 조합(熊東赤色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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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변갑섭(卞甲燮)[1892~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삼진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시위 때 잠시 변갑섭,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황태익 등이 협의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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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하였던 독립운동가. 변상복(卞相福)[189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 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했던 변상복,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등이 계획하고 주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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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변상섭(卞相攝)[1891~1950]은 1919년 4월 3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던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학 등이 계획하고 도모하였는데, 이들은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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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상태(卞相泰)[1889~1963]는 부산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최기백, 성학년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국내의 독립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 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최후로 독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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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상헌(卞相憲)[1897~1965]은 1919년 3월 28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다가 4월 3일의 진동면,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의거(三鎭義擧)를 계획하고 도모하였다. 그는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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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변우범(卞又範)[1898~1974]은 1919년 4월 3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삼진의 만세 운동은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잠시 피신했던 변상태, 권영대 등이 계획하였다. 변우범은 변상태와 황태익의 권유를 받아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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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종열(卞鍾悅)[1896~1974]은 1919년 4월 3일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에 참가하였다. 변종열은 ‘대동 청년단’의 변상태와 동지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황태익 등이 계획하고 도모한 삼진 의거에서 군중 동원 연락을 도맡아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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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오국명은 본관은 해주(海州). 전서(典書) 오광연(吳光延)의 후손이며. 호는 농은(農隱)이다. 오국명(吳國命)[?~?]은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어 부모를 모심에 맛난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와서 그를 보호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심을 칭찬하고 권장하여 상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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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유기원(柳基元)은 유상모(柳相模)의 아들로 호는 모헌(慕軒)이다. 아버지가 병이 깊자 잉어를 구하여 봉양하려 하였다. 밤에 깊은 계곡을 건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주었다. 마침내 잉어를 구하여 봉양하니 효험이 있었다. 마을에서 칭찬하여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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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유복규(柳復奎)의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은민재(隱民齋)로 좌상(左相) 유만수(柳曼殊)의 후손이다.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여덟 개의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다. 부모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물고기를 잡고 땔감을 팔아 항상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자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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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대학교 총장을 지낸 법조인·행정 관료·교육자. 윤태림(尹泰林)[1908~1991]은 경성 제일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국대학 철학과 및 법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일제 말기 고등 문관 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1943년 8월부터 황해도 금천군수로 부임하여 해방될 때까지 재임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경성 지방 법원 사법관 시보에 임명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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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이강영(李康榮)[?~?]은 이정현(李廷賢)의 조카로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를 모심에 있어 몸과 마음을 항상 바르게 하였다. 부모의 병이 깊자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머리를 풀어 내리고 지냈으며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의 묘소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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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이경혁은 이일장(李日章)의 후손으로 호는 모헌(慕軒)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날마다 묘소를 살피며 슬프게 울면서 심히 애통해 하였다. 또 그는 독서를 좋아하였다. 마을에서 그의 효행을 칭찬하고 권장하여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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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이기백(李起伯)[?~?]은 성주 이씨 이국로(李國魯)의 손자로 호는 경와(耕窩)이다.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날마다 묘소에 들렀다. 간혹 홍수가 들어 묘소에 가지 못할 때에는 해안가에 가서 묘소를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 겨울에 눈이 내려 쌓이면 반드시 빗자루를 가지고 가서 쓸었는데 종신(終身)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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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이기봉(李基鳳)[1883~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운동 때 일본 헌병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던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인 등이 계획하고 지방 유지인 변갑섭,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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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이명모(李命模)[?~?]는 이춘혁(李春赫)의 증손으로 호는 낙계제(樂溪齊)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를 모심에 맛난 음식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禮)를 다하여 통곡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추모하며 삼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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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교육가·민족 운동가. 이승규(李承奎)[1860~1922]는 경남 마산의 유지로 1906년 창신 학교(昌信學校)의 전신인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는 호주 선교 본부의 승낙을 얻어 1913년 4월 5일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를 설립하고 창신 학교 유지회를 조직하였으며, 1914년 5월 7일 추산정에서 민족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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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일윤(李一允)[1890~1954]은 1919년 3월 경상남도 마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였다. 3월 1일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마산으로 내려온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의 김관재는 동지 이형재 등과 회동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마산의거(馬山義擧)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창신(昌信) 학교, 의신(義信) 학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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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성(李在性)[1910~1950]은 창원군 진동 공립 보통학교(鎭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3년 1월 김두영(金斗榮), 정두명(鄭斗明) 등이 조직한 ‘혁명적 교육 노동자 협의회(革命的敎育勞動者協議會)’에 참여하여 항일 투쟁 활동을 하였다. 1933년 3월 마산(馬山)에서 김두영, 정두명과 함께 ‘적색 교육 노동자 협의회(赤色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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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이찬휘(李贊輝)[?~?] 는 이보(李𥙷)의 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자 산에 들어가 백일 동안 기도를 드리는데 호랑이가 문득 나타나 이찬휘를 보호하였다. 마침내 영약(靈藥)을 얻어 봉양하니 효험을 보았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극진히 예(禮)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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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미군정 산하 행정 총사령관. 이한식(李漢植)[1898~1947]은 1921년 마산의 창신 학교(昌信學校)에서 수학하다가 19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서주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한식은 남가주 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여 공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42년 미육군에 여섯 번 자원했지만 입대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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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임윤홍(林潤弘)[?~?]은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겨울에 배[梨]를 먹고 싶다고 하자 배를 구할 수 없어 수풀 아래에서 통곡하였는데 홀연히 여러 종류의 배가 낙엽더미에서 나왔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봉양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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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진해 출신의 효자. 정창진(鄭昌鎭)[?~?]은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후손으로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병세를 호전시켰다. 어머니가 병이 깊을 때도 그렇게 하였고, 6년 동안 탕약(湯藥)을 달여 봉양하였다. 마을에서 여러 번 그 효행을 기록하여 포상(襃賞)을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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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계승(曺啓承)[1880~1943]은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 장날의 만세 운동은 조한휘, 한종순, 이찬영, 조병흠, 박건영, 강기수, 한관렬 등이 계획하고 대산면(代山面)의 한문 교사 안지호와 연락하여 3월 19일 함안 장날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계승도 이 계획에 적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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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효자. 조성학(趙性學)[?~?]은 부모를 모심에 효심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며 병세를 살폈으며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 마을의 선비들이 여러번 조성학의 효행을 기록하여 포상(襃賞)을 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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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사회 사업가. 조수옥(趙壽玉)[1914~2002]은 1938년 경남 진주 성경 학교를 졸업한 후 삼천포 교회와 부산 초량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고, 호주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9년부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1940년 9월 20일 부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1년 8월 25일 평양 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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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동락(崔東洛)[1892~1963]은 1919년 3월 21일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기독교 인사들과 창신(昌信)·의신(義信) 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마산으로 내려온 이갑성(李甲成)은 창신 학교 교사 임학찬을 만나 서울의 만세 운동 상황을 전하고 의신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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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범술(崔凡述)[1904~1979]은 1916년 경상남도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였다. 1919년 3월 해인사(海印寺) 지방 학림(地方學林)에 재학 중이던 최범술은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유학 중이던 최원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고 동지들과 함께 만여 매를 인쇄하여 합천, 의령, 진주, 사천 등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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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봉선(崔鳳仙)[1904~1996]은 1919년 3월 21일 마산 의신 학교(義信學校) 재학 중 김남준, 이수학, 안음전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 등을 자신의 집에서 제작하였다. 그는 3월 21일, 의신 학교, 창신 학교(昌信學校) 학생들과 구마산(舊馬山)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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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창원 출신의 효자. 한철충(韓哲冲)의 후손이다. 한광택(韓光宅)[?~?]은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를 모심에 기쁜 마음으로 섬겼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묘소를 찾아 살폈는데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항상 성묘(省墓)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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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창원 출신의 효자. 한필원(韓必源)[?~?] 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허벅지의 살을 베어 내어 봉양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함께 여묘 살이를 하였다. 향도(鄕道)에서 여러 번 그 효행을 기록하여 포상(襃賞)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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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창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근와(謹窩)이다. 허준(許鎨)[?~?]은 성품이 어질고 효심이 깊었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극진히 예(禮)를 다 하였고, 3년 동안 부모의 묘소를 찾아 살폈다. 비바람이 불어도 그 일을 그치지 않았는데 절을 한 자리에 구덩이가 파졌다. 이종기(李鍾杞)와 김도화(金道和) 문중(門中)에 유학하여 경서(經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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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삼진 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홍두익(洪斗益)[1892~1919]은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三鎭)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진 의거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한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등이 계획하였다. 이들은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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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태익(黃泰益)[1877~1953]은 1919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원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그는 거사 전에 변우범을 찾아가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그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황태익은 변상태와 함께 진전면 일암리에서 시위 군중 1,500여 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