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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29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배상현

[정의]

고려 왕조가 존속한 시기[918~1392]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의 창원 지역은 의안군(義安郡), 합포현(合浦縣), 웅신현(熊神縣) 등에 해당한다. 이들 지역은 금주(金州)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감무(監務)가 행정을 담당하였는데, 1282년(충렬왕 8) 의안은 의창현(義昌縣), 합포회원현(會原縣) 등으로 승격되고 현령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창원 지역에는 12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石頭倉)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경상남도 동부 지역의 교통과 물류 유통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신라 말 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왕위를 둘러싸고 항쟁을 지속하는 동안 지방에서는 이른바 호족(豪族)으로 지칭되는 세력가와 농민군 지도자가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창원 지역은 고려와 후백제가 경주의 신라 정부를 포섭하는 데 교두보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견훤이 오늘날 합천 지역인 대량(大良)을 거쳐 한달음에 구사(仇史)로 달려와 진례를 거쳐 경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일은 훗날 고려와 후백제가 본격적인 쟁패를 겨루는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고려 초 창원 지역은 많은 선승들이 머무는 선문(禪門)의 요람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이다. 심희김인광(金仁匡)·김율희(金律熙) 등 지방 유력가들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鳳林寺)를 중창하고 봉림산문을 세워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다.

고려 중기 창원 지역은 삼별초(三別抄)의 많은 공략을 받게 된다. 1230년(고종 17)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삼별초는 1270년(원종 11)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부에서 그들을 해산하려 하자, 배중손을 지도자로 하여 반몽(反蒙)을 기치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 거점으로 삼아 반몽 항전을 전개하였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는 남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별도의 수군을 운용하면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남해에서 이들을 이끌었던 지휘관은 유존혁(劉存奕)인데, 이들의 활동 무대는 오늘날 창원 지역을 포함하는 남해 연안 지역이었다. 특히 합포는 1271년(원종 12) 3월 이후부터 1273년(원종 14)까지 감무가 붙잡혀 가고 전함이 불타는 등 격렬한 공방전을 벌어진 곳이었다. 이는 당시 창원 지역이 경상도 일대 물류 유통의 거점인 데다가, 여몽 연합군이 주둔하는 등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삼별초 항쟁이 끝난 직후 고려는 세계 제국 건설을 실현하려는 원(元) 세조의 강요에 따라 막대한 인력과 함선, 군량 등을 조달하여 일본 정벌에 나서야만 했다. 이로 인해 창원 지역에는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가 설치되고 연합군이 주둔하는 등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로 변모하였다.

1274년(원종 15) 10월에 시도된 제 1차 원정은 원의 도원수 흔도(忻都)와 고려의 도독사 김방경(金方慶) 등의 지휘로 합포에서 출정하였다. 이들은 쓰시마[對馬島]·이키[壹岐] 등을 정벌하고 본토를 공략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귀환하였다. 1281년(충렬왕 7)에 단행된 제 2차 원정은 총 병력 4만 명에 전함 9백 척이 합포에서 출정하였고, 강남군 10만이 가세하였다. 준비 과정에서 충렬왕은 직접 합포를 방문하여 격려하는 등 적극성을 보였으나, 이 역시 작전의 실패와 폭풍을 만나 원정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여 명이 넘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을 겪으면서 창원 지역 주민들이 겪은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제 2차 원정이 있었던 이듬해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은 지역 주민의 노고를 감안하여 의안군의창현, 합포회원현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 세조의 집념은 여전하여 이후에도 여러 번의 계획과 준비가 반복되었으며, 결국 원 세조가 죽은 1294년(충렬왕 20)에 가서야 창원은 병참기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창원은 왜구로 인하여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이끌고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심할 때는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하여 수천 명이 몰려와 노략질을 하기도 하였다. 왜구는 재화를 약탈하고 양민들을 납치하였으며, 양곡을 저장하고 있는 관창이나 조운선 등을 집중적인 공격하였다.

당시 창원에는 고려 국가가 조세의 보관과 수송의 거점으로 삼았던 석두창(石頭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석두창은 육로 상으로 금주도(金州道)의 31개의 역과 직접 연결되었고, 수세권(收稅圈)에 들어있던 함안·칠원·의령·김해 등지의 물산들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이로 인해 창원은 김해 지역과 함께 왜구들의 집중적인 포화를 맞았다.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사례들만 보아도, 1350년(충정왕 2) 6월 20여 척의 배로 침공한 왜구가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을 불살랐고, 1351년(공민왕 원년)에는 50여 척으로 합포를 공격하였다. 급기야 1374년(공민왕 23) 4월에는 350여 척이 합포에 침입하여 군영과 병선을 모두 불사르고 5,000여 명의 군사를 살상한 뒤 재물을 약탈하여 갔다. 우왕 때에는 정도를 더하여 1376년(우왕 2)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집중 공격을 당히니, 합포영이 잿더미가 되고 회원창(會原倉)이 습격을 당하여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창원 지역이 왜구들에게 이토록 큰 피해를 입었던 이유는 국방상 요충지였던 것과 아울러 물산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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