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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028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성진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전개된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또는 종교.

[개설]

유교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철학, 사상, 윤리로서 정치, 문화, 교육 등 개인적·사회적 활동의 원리로 존재해 왔다. 유교는 한국 역사상 삼국 시대 전기에 도입된 이래 학교 교육과 사회 제도를 통해 발전하면서 개인과 가족의 윤리에서부터 국가의 정치사상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 전체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는 보편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창원 지역의 유교 역시 한국 유교 또는 유교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원리를 궁구하고 윤리를 실천하는 학문으로 발전해 왔다.

[창원 유학의 특징]

창원 지역은 유사 이래 이 나라의 남부 해안을 담당하는 행정과 산업의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면서 유교 문화를 발전시켰다. 오늘날 창원시로 통합된 세 도시 즉 창원과 마산과 진해 등 해안 도시가 과거 창원 도호부(昌原都護府)를 이루고 있었는데, 지리적 특성상 외적과 자주 싸워야 했고, 강과 바다를 통한 물화(物貨)의 유통에 큰 몫을 담당했기 때문에 절의와 청렴 등 유교의 사회적 덕목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 점은 몇 가지 객관적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창원 향교지』에 수록된 역대 창원 부사의 문무관 비율을 보면, 17세기 중반까지는 문관과 무관 출신자가 비슷한 비율로 임명되다가 17세기 후반 이후는 무관의 비율이 현저히 증가하여 18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는 거의 무관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창원 지역이 국가에서 담당하는 기능이 주로 군사적 내지 행정 실무적 측면에 집중되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요구했다는 뜻이다. 창원의 서원과 재실에 제향된 인물들의 성격 역시 유학의 이치를 궁구한 인물은 적은 대신, 조선 건국 후 고려를 잊지 않고 물러난 사람, 단종의 폐위와 관련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투에 참가한 사람, 개인적 수양과 향촌에서의 교육 활동에 종사한 인물이 많다. 시기적으로는 고려 후기 인물이 많은 편이며, 주로 절의를 지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교육 기관]

유교의 발달 정도와 경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공사립 교육 기관의 건립 실태이다. 공립 교육 기관인 향교와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 서원에 준하는 재실이 그것이다. 창원 지역에는 향교 세 곳, 서원 십여 곳, 그리고 다수의 재실이 있다.

향교가 셋인 이유는 행정 기구의 변천과 관계가 있다. 현재의 창원에는 조선 시대의 창원 도호부, 웅천현, 진동현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원은 17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건립되어 비교적 늦은 편이며, 재실은 성격이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1. 향교

창원 향교(昌原鄕校)는 고려 충렬왕 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근거를 밝힐 수는 없고, 1405년(태종 5)에 창원시 소답동 현재의 위치 부근에 세워진 것은 분명하다. 창원 도호부 관아의 위치와 관련이 있어 마산으로 옮겼다가 1749년(영조 25) 현 위치에 이건하고 잇달아 부속 건물을 지었다. 그 인적 구성이나 규모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법령에 의하여 도호부 소재 향교로서의 규모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산 향교는 1413년(태종 13)에 진해 향교로 설치되었다가, 그 소재지인 진동면이 1996년 마산으로 편입되면서 마산 향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은 통합 창원시에 편입되어 있다.

2. 서원

창원에 소재한 서원은 19세기 말까지 설립된 것이 5개소이고, 20세기에 설립된 것이 6개소이다. 근대 이전에 설립된 서원도 모두 고종 때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근대 이후에 중건되었다. 이 중 일부는 중창 과정에서 규모가 확대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창원의 서원은 강학 기능보다 제향 기능이 중심이다. 그 이유는 창원의 지리적 여건과 관계가 깊다. 남쪽 해안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말과 조선 초 정변이 잦을 때는 낙향하여 은거하는 인물이 많았으며, 임진왜란 때는 격전지로서 창의한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절의를 기리고 제향하는 서원이 많아진 것이다.

3. 재실

재실은 건립 시기와 규모에 편차를 보이는데, 통합되기 이전 마산시의 면단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주로 문중에서 운영하며, 향사 기능을 가진 재실 중에는 특정인을 향사하는 곳은 적고 선조를 포괄적으로 향사하는 경우가 많다.

재실 중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기와 사정에 따라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창원 사파동의 추원재는 그 전신이 소산재(小山齋)인데, 19세기 중엽부터 지역의 학문과 문학 교육장으로 활용되었다는 내용이 문헌에 전하며, 소산 서당을 거쳐 요천시사(樂川詩社)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또 마산의 관해정(觀海亭)회원 서원(檜原書院)과 분리된 뒤에도 지역 강학 공간으로 오래 활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관해음사(觀海吟社)라는 한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4. 단체

현재의 창원이 행정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이전의 다른 행정 단위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다. 유교 문화와 관련해서는 유도회(儒道會)가 그러하다. 도청 소재지인 창원에는 이전부터 경남 유도회가 있어서 창원 향교에서 행하는 각종 유학의 전례(典禮), 지역 청소년 예절 교육, 강연, 유학 관련 서적의 간행 등을 주관하고 있으며, 마산의 향교에도 유도회가 있어서 독자적인 교육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인물]

창원 지역의 유교적 인물들은 사승(師承) 관계나 학맥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이는 창원 지역의 특성상 유교가 이론적 학문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고 실천과 수행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원과 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명확히 학문적 계통을 중시하여 제향하는 서원은 회원 서원(檜原書院) 정도이며, 한 인물을 단독으로 향사한 곳이 많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 집안의 선대 인물 중 활동이나 업적이 다른 사람을 여럿 합향한 문중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비중이 적다.

학문과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물은 정구(鄭逑)허목(許穆)이다. 정구는 함안·창녕 등 경상남도의 여러 고을 군수를 거치면서 당시 창원 도호부에 속한 합포(合浦)에 자주 드나들었다. 생전에 고을 사람에 의해 관해정(觀海亭)이 세워졌으며, 사후에 회원 서원(檜原書院)이 건립되었다. 허목정구의 제자로서 교유하였으며, 만년에 창원의 달천(達川)에 은거하여 강학을 하였다. 이 두 학자의 영향이 창원 지역 유학계에서는 대표적이다.

[의의와 평가]

창원 지역의 유교는 전통적으로 이론보다는 실천에, 사상보다는 윤리에 비중을 두고 전개되었다. 그것은 창원 도호부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외적에 대항하고 농업 생산과 항운(航運) 등 실무적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원 지역의 향교, 서원, 재실 등 교육기관은 대부분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나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아서, 신흥 공업 도시에서의 전통 문화 계승에 활용될 여지가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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