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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의 노동 운동 중심, 마산 창원 노동조합 총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048
한자 昌原-勞動運動中心-馬山昌原勞動組合總聯合
영어의미역 Labor Movement of Changwon, Masan Changwon Labor and Manag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철

[개설]

1987년 12월 14일 마산·창원 지역에서 19개 노조 대표자 및 간부 약 50여 명이 모여 창립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창립된 노동자들의 지역 연대 조직이었다. 이 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대중적 토대를 바탕으로 8년간 전국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에 서서 정권과 자본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투쟁하였다.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창립되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대다수 노조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연맹 서부경남지부에 가입함으로써 철저한 투쟁 정신과 연대 정신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금속연맹에게 계승시켰다.

[노동자들의 지역 연대 조직이 최초로 출범하다]

1987년 7월~8월 동안 끓어올랐던 창원 지역의 노동운동 열기는 8월 말경에 이르게 되면 일단 가라앉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언론의 부정적인 여론 조성, 쉼 없이 진행되는 집단 해고와 휴폐업 조치, 노조 파괴 공작, 노조 간부 및 활동가들에 대한 구속 등이 있었다. 여기에다 사회적 분위기가 대통령 선거(직선제 개헌과 야당 후보 단일화 문제 등)를 중심으로 돌아간 것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전반적인 노동운동의 약화 국면에서도 의미 있는 노동운동의 교훈이 생겨났다. 즉 업종과 지역을 넘나드는 지역 연대 투쟁이 그것이었다.

이는 (주)통일노조의 노동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87년 8월 초부터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던 (주)통일노조는 8월 28일 마침내 민주 집행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의 강제 연행 및 구속, 이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의 창원대로의 진출 가두시위, 경노협을 중심으로 한 학생 및 시민과의 연대 투쟁 등이 이어졌지만, (주)통일 측은 무기한 휴업 공고를 내렸다. 이에 (주)통일 노동자들과 부산 지역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상경 투쟁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당시 선거 정치에 매몰되어가던 민주화 운동 진영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지역과 업종을 넘어 하나가 되는 노동자라는, 노동자로서의 정체감과 연대감을 가져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통일노조를 중심으로 일어난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풍은 보다 강력한 노동자 연대 조직의 결성의 필요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결성이다. 그 경과를 잠시 살펴보도록 한다. 1987년 11월 18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대 조직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경노협 등과 같은 지역의 노동단체 및 활동가, 그리고 1985년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선진 노동자들의 역량이 결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12월 14일 마산수출자유지역창원국가산업단지의 노동자가 하나가 되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탄생하였다. 당시 총 19개 노조가 발기에 참여하였는데, 마산수출자유지역은 8개 노조, 창원국가산업단지는 11개 노조가 참여하였다. 이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명실상부하게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노동자들의 지역 연대 조직이 된 것이다.

[시대별 활동사항]

1. 1980년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결성 이후 다양한 투쟁 조직을 구성하여 자본과 정권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비록 노동조합 대표자 협의체의 성격으로 첫 출발을 하였지만, 1988년부터 구체적인 지역 연대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 첫 번째 사업이 1988년의 공동 임금 투쟁이었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첫 대중 연대 사업으로 임금 투쟁 공동 교육을 성황리에 마쳤다. 이 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임금 투쟁과 그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1988년 2월 11일 지역 노동자들의 교육과 선전을 위해 『마창노련신문』을 창간하였다. 당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위상은 1988년 신규 노조 결성 당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가입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될 정도로 매우 높았다.

그러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지역 협의체 수준의 단체였기 때문에 임금 교섭 등의 국면에서 직접 당사자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었다. 즉 상급 단체로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개별 사업장의 임금 투쟁을 통일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1988년 4월 14일에 마산·창원 지역 최초의 연대 집회인 공동 야유회 및 임금투쟁보고대회를 창원체육공원에서 가졌고, 4월 17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임금투쟁 승리전진대회 및 노동자 큰 잔치를 창원대학교에서 가졌다. 5월 1일에는 그 동안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립일인 3월 10일의 ‘근로자의 날’ 대신 ‘진짜 노동자의 날’을 선포하고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이러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조직적인 활동의 결과, 1988년의 임금·단체협상투쟁은 매우 성과 있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즉 대부분의 노조가 요구액의 60~80%를 쟁취했고, 시티즌 등의 노조는 100%를 쟁취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지역의 연대 조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정부의 노조 탄압에 맞서 노조 탄압 저지 운동과 구속자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988년 하반기부터 단위 사업장이나 지역 창원을 넘어 노동법 개정 투쟁이라는 전국적인 사회제도 개혁 투쟁에 나섬으로써 정치적 운동의 기조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노동법 개정 투쟁은 정치권과 자본의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지연되고 있었지만, 노동운동 진영은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해내기 위해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 조직을 구축하였다. 이것이 1988년 12월에 결성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로, 550여 개의 조합에 20만여 명의 조합원이 가입하였다. 이처럼 창원 지역에서의 1988년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기축으로 한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되고 나아가 보다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1989년에도 이어지는데, 1989년은 노동운동의 승리와 좌절이 동시에 집중된 해이기도 했다. 이 시기 창원 지역 노동운동의 사례와 성과, 그리고 좌절의 내용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으나, 무엇보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실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중요한 산실이었다는 것이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1989년 및 그 이전의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즉 투쟁의 산물로서 태어난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 조직으로 1990년 1월 22일에 출범하였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과정에서 인적 자원, 물질적 자원, 그리고 노동운동의 자원들을 아낌없이 투여하고 참여하였다. 예컨대 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가입 조합원 2만 6천여 명 중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조합원이 2만여 명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모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기금 1억 3천만 원 중 1억 원 정도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성금에 의한 것이었다.

2. 1990년대

1990년 1월 22일 마침내 전국적인 노동자 단일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1989년 하반기부터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과정에서 그리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활동 과정에서 지도부의 대거 구속과 수배 등이 발생하면서 지도력과 집행력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또한 일부 단위 노조에서도 이러한 사태를 방기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림자동차노조의 압수 수색 및 연행 구속을 필두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산하 노조 및 노동단체에 대한 탄압이 집중되었다. 이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990년 3월 16일 마산·창원 지역 공동투쟁본부(마창 공투본)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노조에 대한 업무 조사 거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탈퇴 거부 등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다시 한 번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지켜냈다.

이 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5·1절 전국 총파업 투쟁, 시민운동단체 및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통한 공안정국 돌파 투쟁, 1990년 4월의 KBS 투쟁과 현대중공업 파업 투쟁, 이영일((주)통일노조 조사통계국 차장) 열사 추모 집회, 반민자당 정권 투쟁 등에 결합한 연대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자본과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이에 따른 지도력의 약화 등으로 인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결국 1990년 5월에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1990년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활동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전체 역사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증언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노동운동의 귀중한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조직의 수호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정치적 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둘째,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전국적인 연대와 실천이라는 노동운동의 기풍을 깊이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셋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중심이 된 창원 지역의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주요한 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1989년과 1990년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활동은 이후 조금씩 달라졌으나, 정권과 자본의 탄압과 압박을 넘어 보다 조직적이고 견고한 노동운동의 틀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청송회였다. 청송회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공식적·비공식적 교류를 많이 하고 있었지만, 노조의 일상 활동마저 극심한 탄압을 받는 상황이 전면화되고 있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및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는 가입하지 않는 대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의 유대와 결속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으로 1990년 11월 20일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청송회는 현실의 탄압 예봉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 민주 노조의 조직 확대와 강화를 지속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후 청송회는 ‘ILO 마산·창원 지역 공동대책위원회(ILO 마창공대위)’ 가입, 청송회 주관의 ‘창원 지역 노동조합 대표자 간담회’ 개최 등의 활동을 시작으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과 그 궤를 함께 하게 되었다.

1988년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창립 이후 창원 지역의 노동운동은 성과와 한계, 투쟁과 좌절, 그리고 탄압과 돌파의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성장하였다. 특히 1991년 이 후 지역에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노동 관련 단체(마창노동교육연구소, 창원노동문제상담소, 일꾼노동상담소, 경노협, 가톨릭상담소 등) 및 지역의 유일한 민족민주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마창연합과의 연대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지역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한편 1992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창원국가산업단지에 불어 닥친 고용 한파에 대처하기 위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992년 11월 14일 ‘마산·창원 지역 고용문제 대책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고용 관련 투쟁 사업장에 대한 공동 투쟁 및 지원 사업, 제도적·정책적 요구 투쟁 및 사업, 그리고 노동법 개정과 고용 안정을 위한 대중적 교육 선전 사업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역사상 처음으로 마산·창원 지역 전체의 산업 전반에 대한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고용 위기에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마산·창원 지역에서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활동은 1995년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5년까지 약 8년간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역사는 마산을 포함한 창원 지역 노동운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해산되는 1995년은 마산·창원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크나큰 획을 긋는 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건설된 것이었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994년 12월 9일 출범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마산창원노동조합연맹을 중심으로 공동투쟁본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고, 1995년 3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마산·창원 지역 공동투쟁본부(마창 공투본)의 공식 출범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마산·창원 지역 공동투쟁본부의 가장 중요한 조직 목표는 단위 노조의 현장 투쟁력 강화와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사업이었다. 이는 약화되고 있는 기미를 보이던 지역 노동운동의 투쟁성과 연대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 노조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조직 활동이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중심으로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새로운 조직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여러 논의와 토론 끝에 1995년 10월 18일 금속연맹 서부경남지부가 구성되고,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대의원 대회 때 이 조직은 금속연맹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가입하고 대의원을 파견함으로써 해산하였다. 한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도 1995년 12월 3일 해산을 공식 결의하였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역시 12월 16일 제8년차 정기 대의원 대회와 해산 대회를 거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산별 노조라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발전 과정에 스며들게 되었다.

이후에도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투쟁은 계속되었다. 특히 1988년 삼미금속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 1989년의 세신실업 구사대 퇴치운동, 그리고 1992년 통일 노동자들의 총액 임금제 분쇄 투쟁은 전국 노동자들의 찬탄을 받은 단결과 연대 투쟁의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선봉으로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설립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마산·창원 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즉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전개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활동은 마산을 포함한 창원 지역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다. 또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조합원 대중이 주체가 되어 공장의 벽을 뛰어넘는 활동과 투쟁, 곧 대중 투쟁과 연대 투쟁을 가장 모범적으로 펼쳐왔던 조직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공동 투쟁, 경제주의적 투쟁과 병행된 제도적·정치적 투쟁, 지역과 업종을 넘어선 연대와 실천,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으로 노동운동을 한 단계 상승시킨 저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얻은 지역 노동자들의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연대와 단결의 중요성을 경험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둘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모범적인 활동은 조직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셋째, 이 결과 노조 위원장의 개인적인 결단이나 서명 등의 형식으로써가 아니라 조합원 총회나 대의원 대회의 의결을 거쳐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에 정식 가입하게 됨으로써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상급 단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넷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1988년 하반기부터 단위 사업장이나 지역 창원을 넘어 노동법 개정 투쟁이라는 전국적인 사회제도 개혁 투쟁에 나섬으로써 정치적 운동의 기조를 확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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