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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057
한자 昌原-儒敎-
영어의미역 Changwon is Flowing the Breathing of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집필자 박태성

[유학과 유학자의 맥락을 찾아서]

창원에는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고 또한 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 중 유학자로서 최초의 인물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은 월영대와 관련된 설화로 회자되고 있으나 징험할 자료가 없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도 창원 지역을 거쳐 간 많은 인물들이 있으나 이들이 창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창원 지역에 유학이 제대로 진작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조선 초기 창원에 족적을 남긴 인물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들이 없어서 그들이 창원에 있는 동안 어떠한 사람과 어떻게 교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뒤로 이어지는 유학적 전통을 통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살필 뿐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쉽지 않다. 근대의 유학과 유학자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정리하여 그 연원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창원에서 유학의 전통을 이어온 최근의 사람들은 누가 있고 그들이 이어온 창원의 유학이 어떠한 연원을 가지고 있는가를 정리하는 것을 우선한다. 즉 근대 창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유학자를 찾아서 그들의 사승 관계를 역으로 거슬러 가면 창원의 유학의 맥락과 유학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창원의 근대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사람은 근래에 세상을 뜬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이며, 칠원의 중원(中園) 배문회(裵文會), 대전의 육천재(育泉齋) 안붕언(安朋彦)은 그의 동학이다. 이들은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의 제자이다. 김눌재만구당(晩求堂) 이종기(李種杞)의 제자이다. 이종기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허전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에게 수학하였다. 또 황덕길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에게 수학하였다. 안정복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이며 이익허목의 제자이다. 허목정구의 계통을 이었고 정구남명(南冥) 조식(曺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이었다.

이를 되짚으면 이황·조식 - 정구 - 허목 - 이익 - 안정복 - 황덕길 - 허전 - 이종기 - 김만현 - 김병린 - 김종하·배문회·안붕언으로 이어지는데, 이상의 정리는 남인과 서인노론의 학맥이 뒤섞여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창원 일대는 조식을 큰 스승으로 모시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조식을 사숙하였고 조식의 학맥이 한 계통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식을 계승한 남명학파는 대개 영남학파 혹은 남인학파라고 할 수 있다.

[영남 남인학파의 흐름]

근세 창원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허전(許傳)이다. 허전황덕길을 이은 기호의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황덕길창원황씨로서 창원 적현동에 그의 무덤이 있다. 황덕길을 스승으로 모신 허전이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십여 년이 넘도록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굳이 이곳에서 임기를 거듭하면서 창원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 유학의 학풍을 진작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황덕길의 문집인 『하려선생문집(下廬先生文集)』은 총 19권 10책으로 1918년 현손 황준성(黃駿性) 등이 창원의 장복산 아래에 있는 장산재(長山齋)에서 간행하였다. 이용구(李容九)의 발문과 노상직(盧相稷)의 후지(後識)가 있다. 당시 소산 김기호, 함안의 일산 조병규, 칠원의 덕암 황희수, 흘와(吃窩) 이근옥, 동애(東厓) 조선수(趙善秀), 회수(悔叟) 이민식(李敏植) 등과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산청의 단계 김인섭(金隣燮),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밀양의 소눌(小訥) 노상직, 합천의 후산 허유, 창원의 물와(勿窩) 김상욱(金相頊) 등이 모두 허전의 문인들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창원에는 허전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크게 진작되었다. 창원의 사파동에 있었던 김기호도 그 중의 하나이다. 김기호의 자는 문범(文範)이고 김녕인(金寧人)으로 조선 단종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3세손이다. 김기호는 자신과 강학했던 문도(門徒)들과 요천시사(樂川詩社)를 결성하여 활발한 시회(詩會) 활동을 하면서 학문을 탐구하였다. 또한 소산재(小山齋)에서 강학하며 창원 일원에 많은 제자들을 남겼고 문집으로는 『소산집(小山集)』이 있다. 그의 제자로는 황학수(黃學洙)가 있다.

김상욱상산김씨창원 동읍 석산 사람이다. 김상욱김명윤의 후손으로 당시 산청군 법물리(法勿里)에서 온 김인섭·김진호 등이 같이 강학한 것도 이들이 모두 상산김씨였기 때문이다. 김상욱의 문집으로는 『물와문집(勿窩文集)』이 있는데 2책이다. 또 동읍의 곡목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만휴(晩休) 김만현(金萬鉉)이 있다. 김만현김해김씨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의 후손이다. 그의 문집인『만휴집(晩休集)』은 1935년 재종손 김병린(金柄璘) 등이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의 「만휴당집서(晩休堂集序)」가 있고, 책 말미에는 파산(巴山) 조정래(趙正來)와 그의 증손 김광하(金光河)의 발문이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김만현과 한 집안 사람인 김병린이 대두된 것이다.

김병린(金柄璘)의 처음 이름은 김병린(金柄麟)이며, 자는 겸응(謙膺) 호는 눌재, 본관은 김해이며, 금산공(琴山公)이 후손이다. 이종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도학과 문장으로 영남 일원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눌재선생문집(訥齋先生文集)』이라고도 하며 총 17권 9책이다. 또한 『용계아언(龍溪雅言)』 1권이 있다. 김병린은 아들 김종하를 비롯하여 인근에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김종하는 1962년에 혼자의 힘으로 창원의 역사와 향토 지리, 인문사회 전반을 기술한 『창원군지(昌原郡誌)』를 편찬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감기현(甘騏鉉)창원 내리동 사람으로 자는 영팔(英八)이며 호는 동미(東湄)·눌재(訥齋)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초계군수와 김해부사를 역임하고 통훈대부가 되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창원 내리동으로 돌아와 문중을 다스리는데 힘쓰면서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 『동미문집(東湄文集)』은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계학파의 흐름]

창원의 유학의 또 다른 맥은 퇴계학의 맥을 이은 것이다. 퇴계학의 계승자로 알려진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동생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이 의령에서 벼슬을 하였다. 그는 이황 - 김성일(金誠一) - 장흥효(張興孝)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었다. 이 때 창원의 곡천 김상정(金尙鼎), 우곡(愚谷) 박신윤(朴身潤), 영산의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 밀양의 송와(松窩) 안명하(安命夏) 등이 의령으로 찾아가서 이숭일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 중에서 박신윤에 대해 이숭일은 ‘남쪽의 아름다운 선비’를 만났다고 기뻐할 정도로 칭송하였으나, 박신윤은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신윤의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우곡이다. 밀양박씨로 창원 사화(沙火) 사람이다. 그의 저서인 『우곡선생문집(愚谷先生文集)』은 총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김상정창원 동읍 사람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덕삼(德三) 호는 곡천이며, 부장(部將) 김이견(金以堅)의 아들이다. 김상정의 저서로는 『곡천선생문집(谷川先生文集)』이 있다.

이들 이후에 창원에서 이들을 직접 계승하여 퇴계학파를 이은 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창원의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며 영남학파인 허전에게 수학한 박치복이 있다. 박치복은 창원과 관련이 깊은 유치명(柳致明)에게 수학하였고 유치명이현일의 맥을 이은 남한조(南漢朝)에게, 남한조이현일의 직계인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상정은 이현일의 아들인 이재(李栽)에게 수학하였다. 그러므로 창원의 퇴계학파는 따로 형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영남학파를 이루는 큰 물길에 한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원에 족적을 남긴 거유들]

옛 창원 지역(창원도호부 지역)에 족적을 남긴 최초의 유학자는 신라시대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의 행적은 현재의 진해인 웅천의 조룡대를 비롯하여 월영대·관해정 등에 전설처럼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창원의 유학에 끼친 영향은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 창원에 행적을 남긴 유학자로는 안축(安軸)이 있으나 한 편의 시만 남았을 뿐 유학적 교유 관계는 찾을 수 없다. 이 후 이첨·서거정 등이 창원을 다녀갔으나 그들 역시 시 몇 수만을 남겼을 뿐이다.

현재의 창원에 영향을 끼친 거유로는 한국 유학의 거두인 정구허목이 있다. 정구는 함안에서 벼슬을 하면서 월영대와 관해정 등 당시 창원 지역을 유람하였고, 이 지역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큰 학자가 있으면 그를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숭일·허전의 경우로 보아, 정구가 있던 함안은 창원과 접경이었고 특히 정구가 경상남도의 주 학맥인 남인학파에 속하므로 그에게 찾아간 제자들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징험할 자료가 없다.

또한 허목정구의 학맥을 이은 유학자로 몇 년 동안 창원 북면의 달천동에 기거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인접한 거리에 있었으므로 그 사이에 많은 제자들과 학자들이 서로 교유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이 역시 징험할 자료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들은 창원의 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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