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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마산은 군사 도시였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07
한자 高麗時代馬山-軍事都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신은제

[변방의 조창]

지금의 창원시 마산회원구 일원은 고대 포상 팔국 가운데 하나였던 골포국(骨浦國)이 있었던 곳이다. 골포국포상 팔국 전쟁에서 패배한 뒤 가야의 안라국에 병합되고 뒤이어 신라에 병합되었다. 신라 경덕왕은 골포현을 합포현(合浦縣)으로 개명하고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이 되게 했다.

신라 말 최치원의 은거지였던 합포현은 1018년(현종 9) 대대적인 군현 체제의 개편을 거치면서 금주(金州)의 속현이 되었다. 속현이었던 합포는 이 지역 토성(土姓)이었던 감(甘)·유(兪)·정(鄭)·현(玄)씨와 같은 재지 세력에 의해 통제되었을 것이다. 당시 합포 지역의 읍세가 어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인구는 1,915명이었고 이 가운데 남자 889명, 여자 1,026명이었다. 1018년 방어사(防禦使)가 설치된 양산의 인구가 1,788명이었고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평현(東平縣)의 인구가 627명이었으며, 같은 금주의 속현이었던 웅신현(熊神縣)의 인구가 641명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합포현의 인구는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의 인구가 1만 3872명, 함안의 인구가 6,687명에 달했던 사실에 견주면 읍세가 그리 크지 않은 변방의 작은 속현이었다.

고려에서 합포는 다른 측면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비록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으나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에 위치한 합포현에는 낙동강 하루 지역의 세곡을 모아 수도인 개경으로 발송하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었다. 『고려사』 식화지 조운조의 기록에 의하면 석두창에는 6척의 초마선을 배치해 김해·함안·칠원 등지에서 수취한 6,000석의 세곡을 운송하게 했다. 조창은 귀중한 세곡을 모아두는 곳이므로 세곡의 보관과 보호에 만전이 기해졌다. 사천의 통양창에 성곽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합포석두창에도 성곽과 같은 보호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별초와의 격전지]

조창이 위치해 중앙 정부와 직접 교류하고 있던 합포현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삼별초의 항쟁이 발발하면서부터였다. 원종이 몽골에 친조한 뒤 개경 환도를 단행하자 이에 반발한 삼별초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한 후 진도로 이동하여 원종과 몽골에 대항했다. 진도에 자리 잡은 삼별초는 남해안 각지를 적극 공략했는데, 주대상지 가운데 하나가 합포현이었다. 1271년(원종 12) 3월 삼별초합포에 들어와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이듬해 11월에 다시 합포를 공격해 전함 22척을 불태웠다. 1273년(원종 14) 1월 합포를 공격해 이번에는 32척의 전함을 격침시켰다.

삼별초합포를 지속적으로 공격한 것은 합포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었다. 당시 마산만은 일본으로의 출발지였으므로 일본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던 삼별초나 일본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여몽 연합군에게 모두 요충지로 간주되었다. 1271년(원종 12) 9월 김해 인근에서 일본으로 떠났던 조양필(趙良弼)이 1272년 정월 일본인들과 함께 합포현으로 돌아왔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당시 합포가 대일 교류의 출발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합포의 가치는 조창에 의해 배가되었다. 합포에는 개경으로 수송할 세곡이 쌓여 있었고 때문에 진도와 개경에게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합포삼별초와 여몽 연합군에게 놓칠 수 없는 격전지가 되었다.

[일본 정벌의 전진 기지]

삼별초 항쟁이 진압된 후 합포는 본격적으로 일본 원정의 전진 기지로 탈바꿈하였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과 만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거제도로 인해 합포는 태풍의 영향을 적게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과 최단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석두창이 존재해 다른 지역에 비해 군량을 확보하기도 용이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1273년(원종 14) 4월 김방경(金方慶)과 힌두[忻都]가 제주의 삼별초를 정벌한 뒤 일본 원정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274년 5월 원나라는 15,000명의 군사를 고려로 파견했고, 고려에서는 900척의 크고 작은 전함을 건조해 그해 6월 금주(金州)로 보냈다. 금주에 위치한 전함의 집결지는 합포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원종의 사망으로 일본 원정은 잠정 중단되었다.

중단은 일시적이었다. 왕위에 오른 충렬왕은 즉위년 10월 3일 합포에서 2만 5000명의 한족·몽골족 연합군과 8,000명의 고려군, 6,000~7,000명의 뱃사공을 900여척의 배에 분선 출발시켰다. 이로써 당시 약 4만 명의 병력이 합포 인근에 집결 주둔하였고, 900여 척의 배가 지금의 마산만 일대에 분산 정박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합포는 명실상부한 일본 원정의 전초 기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1차 원정군은 먼저 쓰시마를 정벌하고 이끼[壹岐]를 거쳐 하카다 만으로 돌입하였으나, 불현듯 불어 닥친 태풍으로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차 원정의 실패에도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279년(충렬왕 5) 남송 정벌을 완료한 쿠빌라이는 1281년 다시 일본 정벌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고려 왕이 직접 합포로 와 일본 정벌을 독려했다. 충렬왕은 1281년 4월 15일 우부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데리고 합포에 도착해 18일 군대를 사열하였다. 2차 원정 시 합포에서 출발한 병력은 원의 군사가 3만 명, 고려 군사가 1만 명이었으며 동원된 뱃사공이 1만 5000명이었고 전함이 900여 척에 달했다. 2차 원정에는 중국 남송에서 출발한 강남군 10만 명도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고려에서 출발한 군대와 하카다 만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차 원정군도 카미카제[神風]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실패로 막을 내렸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합포 인근의 주민들도 건함 건조와 군량 마련 등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본 원정은 합포에게는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합포는 일본 원정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충렬왕은 1282년(충렬왕 8) 합포현을 회원현(會原縣)으로 개명하고 현령을 파견해 주읍으로 승격시켰다.

주읍으로 승격 못지않은 변화는 합포가 일본과 고려를 잇는 전방의 군사 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사』 충렬왕 세가에 의하면, 일본 원정이 끝난 1281년 10월 금주 등처에 진변 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인 진변 만호로 인후(印侯)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의하면 이듬 해 인후합포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합포에 주둔한 원나라 군대가 철수한 뒤 고려군이 대신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둔한 군영은 회원현의 읍치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 경상도 창원 도호부 고적조에 의하면 옛 회원현의 읍치와 군영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다. 또 고려 말 왜구 침략의 기록에서도 합포영회원현을 별도로 기재해 군영이 합포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원정은 합포의 경관도 변화시켰다. 합포는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온 패잔병과 부상자들로 넘쳐 났을 것이며 이들이 기거하고 치료 받을 장소를 제공해야 했다. 전함 건조를 위한 각종 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900여 척의 전함이 정박할 항구와 수만의 군사가 소비할 군량의 보관을 위한 적재 시설도 마련되었을 것이다. 군량의 경우 기본적으로 석두창 창고가 적극 활용되었을 것이나 많은 군량을 감당하기 위해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합포에는 일본 정벌에 사용된 다수의 병장기도 보관되어 있었다. 1289년(충렬왕 15) 윤10월에는 원나라에서 합포에 보관되어 있던 병장기를 검열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 원정은 합포를 새로운 군사적 요충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왜구 방어의 최전선]

합포가 군사적으로 더욱 강조된 시기는 고려 말이었다. 1350년(충정왕 2) 2월 왜적들이 고성 등지를 공격한 이래 고려 해안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왜구들이 창궐했다. 회원현합포의 군영은 1350년 왜선 20척의 공격을 받아 영(營)이 불타는 타격을 입은 이래 지속적으로 왜구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에 의하면 왜구는 우왕 3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 회원을 공격하였으며, 그 수도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540척에 달했다. 왜구들이 이처럼 합포를 노략질한 것은 지리적으로 합포가 고려와 일본을 잇는 교두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합포에는 예로부터 인근의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조 동란기 군량의 확보가 현안이 되었던 상황에서 고려의 조창은 왜구의 좋은 약탈 대상지였다.

합포는 왜구의 약탈 과정에서 수 차례 파괴되고 중건되었다. 파괴와 중건의 과정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 도호부 관방조에 기록된 합포영성기(合浦營城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합포영은 1350년 6월 왜적의 공격으로 불탔다가 1374년(공민왕 23) 350척의 대규모 왜구의 침공을 받아 다시 군선과 함께 전소되었다. 이 합포영을 정비한 이는 조민수(曺敏修)였다. 조민수는 경상도 도순문사로서 폐허가 된 합포영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러나 1376년(우왕 2) 합포영은 다시 왜적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렸다. 조민수의 뒤를 이어 합포영의 중건에 나선 이는 우인렬(禹仁烈)이었다. 그는 1377년(우왕 3) 당시 경상 도원수(慶尙道元帥) 겸 합포 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로 재직하면서 합포영의 정비에 나섰다. 그러나 그 해 5월 중영을 완수하지 못한 채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 후임으로 배극렴이 임명되었다. 배극렴은 경상도 도순문사로 부임하여 우선 합포의 영을 정비한 뒤, 이어 왜적의 방어를 위한 성곽을 축조하려 했고 성의 기초를 완성하였으나, 흉년으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1378년 배극렴은 본격적으로 성곽 축조 공역을 시작하여 9월부터 11월까지 두 달에 걸쳐 합포영성을 완성했다. 이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291척, 높이는 15척이었으며, 성안에는 다섯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안에는 또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가 있어 군량을 저장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1차 침략지이자 1차 방어지였던 합포 군영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374년 350척의 왜선이 침입하여 군영과 군선을 불태웠을 때 사망한 군인이 5,000명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합포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합포영성의 완성과 대규모 병력의 주둔은 합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우왕 4년 이후 부분적으로 합포가 왜적의 공격 대상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전과 같이 합포영이 왜구에 의해 번번이 불타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임진왜란까지 합포영성은 왜구 방어의 주요한 요새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이후 합포는 왜구 방어의 주요한 진(鎭)이 되었고 이곳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영을 두었다. 합포영성은 세종 12년 최윤덕에 의해 수축되었고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영성을 파괴할 때까지 왜구 방어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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