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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민주 성지가 된 마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13
한자 激動-韓國現代史-民主聖地-馬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 10월 봉기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 2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 2대 대통령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 3대 대통령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 4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 3·15 마산 의거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10·18 부마 민주 항쟁 발발

[정의]

경상남도 마산 지역이 ‘민주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대적 사건과 배경.

[두 갈래로 나뉜 사회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서울에서는 여운형의 주도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조선 건준]가 결성되었다. 8월 17일 발표된 조직 명단을 보면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 부장 최근우, 재무 부장 이규갑, 조직 부장 정백, 선전 부장 조동호, 무경 부장 권대석 등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남에서도 17일 부산 동래 온천장 동운관에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경남도 지부’[경남 건준 ; 위원장 노백용]가 결성되었고, 같은 날 마산 공락관[이후 시민 극장으로 바뀜]에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마산부 위원회’[마산 건준 ; 위원장 명도석] 결성 대회가 열렸다.

서울과 부산에서 결성된 조선 건준·경남 건준이 친일파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한 반면 마산 건준에는 일제 치하 부회의원[시의원] 출신이거나 친일 혐의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 대장 등 핵심 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이 같은 마산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 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마산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마산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때부터 마산의 사회 운동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마산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마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우익 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 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당시 우익 단체의 대표 인물은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 청년단·대동 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 청년단], 이인호[서북 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년 3·15 의거 당시 반공 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 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 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 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 총연맹 등 관변 단체의 모태가 됐다.

[해방 직후 미 군정에 저항한 마산 시민]

마산 건준에서 우익 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 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 전선 마산시 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이들은 특히 1946년 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시와 창원군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마산에서는 10월 7일 마산 시청 앞과 남성동, 그리고 신마산 일대에서 수백~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12명의 시민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의 군중이 체포됐다. 또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당시 민주주의 민족 전선 마산시 위원회 선전 부장이던 이상조를 비롯한 김용찬·김환·유근완·이병도·김윤기 등이 체포됐으며, 민전 위원장이던 이필근을 비롯한 김명규·박양수 등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원군에서도 9일과 11일 사이에 역시 봉기가 일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소는 알 수 없으나 9일 오후 8시쯤 200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 점거에는 실패하고 체포됐으며, 11일 웅천면에서도 4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으며, 24명이 체포된 것으로 미군정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만 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 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년 3·15 의거나 1979년 부마 민주 항쟁 보다 훨씬 대규모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년 2월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경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선거에서 드러난 마산 시민의 저항 정신]

1948년 정부 수립 당시부터 마산은 ‘민주 성지’에 앞서 ‘야당 도시’였다.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치러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산 시민은 우익 세력의 대표 주자이자 토박이였던 손문기를 보기 좋게 낙선시키고 귀환 동포들의 지지를 받는 권태욱을 압도적 표차로 당선시켰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권태욱은 손문기와 김순정 등 쟁쟁한 우익 인사들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한다.

이어 전쟁 직후 첫 정당 대결로 치러진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막강한 재력과 자유당의 위세를 업은 김종신이 당선되지만, 4년 후 1958년 총선에서 마산 시민은 다시 자유당과 김종신을 낙선시키는 대신 민주당 허윤수 후보를 당선시킨다. 경력과 명망, 재력과 조직력 등 모든 분야에서 도저히 비교할 수 없었던, 거기에다 행정과 경찰의 노골적인 지원까지 받은 김종신 후보가 마산 시민에게 외면당했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왜 마산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까?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이거나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 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재판 절차도 없이 대다수를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휴전된 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가족들은 이승만 정권과 경찰·우익단체의 서슬에 눌려 억울함을 하소연도 못한 채 가슴 깊이 한을 품고 있었다. 아무도 말은 안했지만 대다수의 마산 시민 역시 무고한 민간인을 그처럼 처참하게 학살한 이승만 정권에 대해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다.

전국의 대다수 국회의원들도 이런 민심을 알고 1952년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축출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토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총칼로 위협, 대통령을 직선토록 발췌 개헌을 강행한 후 재선을 노리고 출마한다.

8월 5일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마산 시민들은 마침내 반란을 시도한다. ‘이대로 더 4년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구호와 함께 진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출마한 조봉암 후보에게 마산에서만 1만 1262명이 몰표를 몰아준 것이다. 당시 마산의 유효 투표자 수는 3만 3559명이었으니 33%의 시민이 조봉암을 밀었던 것이다. 이는 전국 평균 조봉암의 지지율[11%]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그야말로 ‘마산 시민의 반란’이었다. 당시 창원 군민들도 총 7만 7332명의 투표자 가운데 2만 2630명이 조봉암을 찍어 29%의 지지율을 보였다.

2대 대선에서 이같은 민심을 확인한 조봉암 지지 세력은 1956년 3대 대선을 앞두고 그해 1월 26일 윤길중·김달호 등과 함께 진보당 창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들은 그러나 미처 진보당 창당도 못한 채 준비 위원회의 이름으로 조봉암을 5·15 정·부통령 선거에 내보낸다.

마산 시민들은 이 선거에서 또다시 진보당 선풍을 일으킨다. 이승만 측의 선거 부정만 없었다면 적어도 마산에서는 조봉암 대통령이 선출됐을 만한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2만 2770표, 조봉암은 2만 156표를 얻었다. 당시 마산의 유효 투표자 수는 4만 2926명으로 47%의 시민이 진보당 대통령 후보를 밀었던 것이다. 당시 창원 군민 2만 4653명[40%]이 조봉암 후보를 지지했다. 이 역시 조봉암의 전국적인 득표율 36%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산은 ‘야당 도시’가 되었고, 이후 ‘민주 성지’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반란이 일어났을까. 조봉암의 처가가 진해였다는 사실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앞서 밝힌 대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한이 조봉암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풀이된다. 조봉암은 당시 ‘비국민’으로 낙인찍힌 보도연맹 가입자 가족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대량으로 학살당했고,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심지어는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호소 한마디 못하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었던 것이다. 서중석은 경상도 지방에 조봉암 지지자가 특히 많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경상도 지역은 인민군이 부분적으로 장악했을 뿐이어서 경찰 등에 의한 보도연맹 가입자의 대량 학살은 있었으나, 동족상잔은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협하는 조봉암을 끝내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1958년 7월 31일 조봉암을 사형시킨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마산 시민들은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항쟁을 일으키게 된다. 3·15 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8·15 해방 이후부터 드러난 마산 시민의 진보 성향과 반독재 정신이 시민 항쟁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4·19 혁명을 촉발시킨 3·15 마산 의거]

3월 15일 아침 전국에서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각 투표소마다 야당 참관인이 입장을 거부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산의 경우 시내 47개 투표소 가운데 세 군데만 참관인이 입장할 수 있었다. 이날 아침 투표소로 가는 길목마다 자유당 완장을 찬 당원과 녹색 제복을 입은 반공 청년단원이 할당된 구역에 진을 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때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카랑카랑한 여성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당 참관인이 투표함 검사도 못하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떳떳하다면 어디 투표함 좀 열어보라구요!”

이 투표구 참관인이었던 민주당 정남규 도의원의 부인 안맹선[일명 순이]은 선거 위원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자유당 참관인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벌써 확인이 끝난 일을 어디서 행패야”하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순간 안 씨는 옆에 있던 투표함 하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이때 함 안에서 사전 투표용지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이 사건이 3·15 마산 의거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이었다.

마산 장군동 투표소에서 사전 투표함이 발각된 후 오전 9시가 되자 남성동 민주당 마산시 당부 앞에는 선거 번호표를 받지 못한 시민들이 몰려와 “도둑맞은 내 표를 찾아 달라”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산시 총유권자의 20%에 달하는 1만 3000여 명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고 사전 투표를 감행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긴급히 확대 간부 회의를 소집, 오전 10시 30분 마침내 전국 최초로 독자적인 선거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어 오후 1시쯤 도의원 정남규와 동아대 학생 안종성이 마이크를 통해 민주당의 선거 포기 사유를 밝히면서 관권의 탄압을 뿌리치고 과감히 기권할 것을 호소했다. 오후 3시, 민주당 마산시 당 사무실과 불종거리에 학생 300여 명과 시민 1,200여 명이 운집하게 되자 마침내 선전용 지프를 동원, 가두시위에 나서기로 했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의해 제지된다.

흥분한 군중 앞에 나선 손석래 마산 경찰 서장은 마이크를 들고 “민주당의 악선전에 현혹되지 말고 어서 귀가하라”고 외쳤으나, 시민들은 “집어치워라”, “물러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이때 한 학생이 반박 연설을 위해 서장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자 경찰관들이 몰려들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 학생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본 군중이 흥분, 경찰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자 경찰은 슬그머니 철수하고 말았다. 3시 30분 정남규를 비롯한 민주당 간부 20여 명이 머리띠를 둘러매고 시민들과 함께 거리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협잡 선거 물리치자”, “민주주의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불종거리와 창동, 부림 시장, 남성동 파출소, 서성동 어업 조합을 지나 다시 불종거리까지 한 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불종거리 승합차 종점 부근에 이르자 긴급 출동한 경찰이 민주당 간부 6명을 몽둥이로 후려치며 강제 연행하고 만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분개하여 남성동 파출소와 자유당 마산시당 쪽으로 몰려갔다. 파출소 앞에서 소방차의 물세례에 멈칫한 시위 군중은 다시 파출소와 그 옆에 있던 자유당 시당부를 향해 투석전을 벌이며 저항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무장 경찰이 시위 주동자로 보이는 시민과 학생을 속속 파출소 안으로 연행해 갔다.

이 때 ‘난데없이 헤아릴 수도 없는 녹색의 괴한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이들은 바로 반공 청년단이었다. 몽둥이를 손에 든 이들 괴한은 군중 속을 종횡무진하며 어린 학생의 머리를, 노인의 등을, 부녀자의 어깨를 마구 갈겼다. 민권은 피 흘리고 백성은 개처럼 맞았다. 선혈이 낭자하게 거리를 물들였으며 시민은 뿔뿔이 후퇴했다.

시민들은 민주당 사무실 앞에 있던 데모대와 합류하여 다시 시위에 나섰으나 트럭에 타고 온 반공 청년단의 추격을 받았으며, 그들의 몽둥이세례를 피하여 형무소까지 후퇴하면서 완강히 저항했다. 시가가 어둠에 싸일 무렵 시민들은 마치 언약이라도 한 듯이 “밤에 보자”고 이를 갈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시위 군중에 대한 반공 청년단의 잔인한 테러는 그날 밤 시민의 거대한 봉기를 이끌어낸 큰 요인이 됐다. 이은진 경남대 교수는 이를 ‘밤 시위를 촉발시킨 낮의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낮 시위가 제대로 진압되고 만일 시민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밤 시위가 우연히 그 많은 시민들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대부분의 참여자들의 진술과 시위에 대한 관찰을 종합해 보면 낮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과 반공 청년단의 폭력적 탄압이 시위자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집에 식사하기 위해 모인 식구들에게 또는 이웃 주민들에게 인적 연결망을 통해 전파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이 밤 시위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반공 청년단은 이날 밤에도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무학 초등학교 앞의 실탄 진압에 성공한 경찰과 함께 미친 듯이 총기를 휘두르며 시가지 전역을 공포 분위기를 몰아넣는다. 시위대의 소탕을 위해 기관총을 장치한 지프를 앞세우고 사람의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무차별 총기를 난사했던 것이다. 이날 남성동 파출소 앞, 마산 시청 앞, 북마산 파출소 앞 등에서 9명의 학생과 시민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그 후 마산 시가지가 경찰에 의해 완전 장악된 16일부터 18일까지 검거 선풍을 주도한 자들도 이들 반공 청년단과 경찰이었다.

이후 숨죽이고 있던 마산 시민은 4월 11일 중앙 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소년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다시 분노했다. 시위는 그날 오후 6시 15분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마산 도립 병원 앞길에서 시작됐다. 300명의 중·고교생이 앞장선 이날 시위는 삽시간에 2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경찰서를 포위하고 유리창을 깨부쉈으며 서류뭉치를 찢어발겼다. 마산 시장 관사와 변절한 허윤수 의원의 집은 박살이 났고, 함께 변절한 김성근 시의원의 집과 서울 신문 마산 지국도 시위대의 집중적인 돌멩이세례를 받았다. 시위대는 또한 동양 주정을 습격하고 창원 군청을 점거, 보관 중이던 투표함을 끌어내 불살랐다.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됐다.

14일에는 진주시와 진양군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며, 15일에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민주 당원 100여 명이 마산 3·15 유혈시위 1개월을 맞아 규탄 대회를 열려다 저지당하자 농성과 시위를 감행, 시청 앞까지 행진을 벌였다. 같은 날 부산 동래고교생 1,000여 명도 시위를 시도했으며, 16일에는 충청북도 청주공고생들이 청주역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17일에는 인천 민주 당원들의 시위를 비롯, 경상남도 창녕과 하동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18일에는 부산과 청주에서 재차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데 이어 마침내 서울에서도 고대생 3,000명이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이날 고대생의 시위에서도 3월 15일 마산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정치 깡패들로 구성된 반공 청년 단원들이 쇠망치와 몽둥이·쇠줄·벽돌 등 흉기를 들고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이 일로 200여 명의 학생이 피투성이가 됐다. 학생들을 습격한 깡패들은 반공 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이었고, 경무대 경호 책임자 곽영주와 깡패 임화수의 수하에 있던 자들이었다. 3·15 밤시위가 반공 청년단의 폭력 테러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로 발생했듯, 4·19 혁명도 이처럼 반공 청년단의 고대생 습격 사건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대광고교생 1,000여 명이 경찰의 바리케이드(barricade)를 넘어 바깥으로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대와 건국대·동국대·서울사대·고려대·중앙대·연세대·성균관대·경희대·경기대·단국대·국학대·국민대·한양대·서라벌예대·성신여대·홍익대와 서울 지역 고교생 등 10만여 명에 이르는 청년 학생들이 분연히 궐기한 것이다. 때맞춰 부산과 광주에서도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는 결국 186명이 경찰의 발포에 숨지고 6,000여 명이 다치는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날 이후에도 인천·군산·포항 등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심지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재미 유학생들까지 시위를 벌였다. 25일에는 고려대 이종남, 서울대 이희승, 연세대 정석해, 성균관대 조윤제 교수 등이 주동이 된 300여 명의 대학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섰고, 26일에는 다시 10만여 명의 군중이 서울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는 수송 초등학교 100여 명의 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12년간 권좌를 틀어쥐고 있던 이승만은 끝내 하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기붕은 일가족과 함께 집단 자살했고, 이승만은 이후 하와이로 망명길에 나선다.

이처럼 3·15 마산 항쟁과 김주열 등 어린 학생들의 처참한 죽음에서 촉발된 4·19는 해방 이후 최초로 민중이 정권을 쓰러뜨린 위대한 민권의 승리로 귀결된다. 이는 또한 수많은 민중이 희생된 대가였으며 ‘민주주의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는 역사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피의 대가는 민중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4·19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고, 끝내 일부 정치군인들의 5·16 쿠데타로 인해 민주주의는 또다시 긴 어둠의 터널 속에 파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 운동은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이었다. 5월 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 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 규명 운동은 마산 유족회와 경남 유족회, 전국 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이와 함께 마산에서는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혁신 정당 운동, 한국 영세 중립화 통일 추진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 그리고 교육 민주화를 위한 교원 노조 운동 등이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영세 중립화 통일 추진위 김문갑 위원장, 피학살자 유족회 노현섭 회장, 교원 노조 이봉규 중등 위원장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산 명령을 내린 군사 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 연맹 등 관변 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 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 사회도 다시 우익 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다시 민주 성지로 우뚝 서게 한 10·18 민주 항쟁]

이렇게 마산은 다시 강요된 침묵의 도시로 되돌아갔다. 이 침묵을 깬 것은 1979년 10월 18일 경남대 학생들이었다.

“학우 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 헌법을 유일하게 전국 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 대학생 연합회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중략]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 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 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 일입니다. 자고로 자유의 나무는 피를 마시며 성장한다 하였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저의 뜻을 알았다면 지금부터 일어서서 과감히 나가 싸웁시다. 죽는 것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학생들은 이 학교 국제 개발학과 2년생 정인권의 선동 연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 나가자!”는 함성을 질렀다. 정씨는 이 순간을 이렇게 술회했다.

“오랫동안 가슴 삭이며 분노하며 기다리던 학우들은 그 순간 내가 욕설을 퍼부었던 경남대생들이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그 순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의 희열 때문에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엄청난 학우들이 일거에 일어서며 잔디밭을 뛰쳐나가기 시작하였다.”

10.18 마산 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경남대에서 시발된 이날 시위는 당초 정성기·신정규·최갑순·옥정애 등이 당초 22일로 잡았던 시위 계획보다 앞당겨진 것이었다. 여기에는 부산에서 이미 16일 시위가 터져버린 데다 이진욱[법학과 1년]이 전날 밤 ‘민주 대학생 혈맹’이라는 이름의 격문을 교내 곳곳에 부착했고, 18일 오후 돌연 휴교령이 발표되는 등 변수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의 시위 행렬은 날이 어두워지면서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중심이 학생에서 노동자와 실업자 등으로 바뀐 것이었다.

“불종거리에서 갑자기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민들이 다수가 되고 학생이 소수가 되었으며 수천 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때부터는 시위 투쟁 방식이 완전히 학생 스타일을 벗어났다. 누군가 “공화당사로 가자”고 외쳤다. 모두 공화당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오동동 쪽으로 내려가면서 모두 흥분하기 시작했고, 사람은 계속 불어났다. 오동동 다리쯤에서는 1만여 명은 되었던 것 같다. 산호동 공화당사를 공격하는 데는 나이가 어린 노동 청년들, 깡패들이 앞장을 섰다.”[주대환의 증언].

박영주가 『마산 문화』 4[1985년]에 쓴 「10.18 마산 민중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도 이날 오동동 시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시위 군중의 엄청난 수에 질려버린 경찰은 차를 버리고 도망을 쳐버렸다. 경찰이 버리고 간 트럭은 시위 군중의 몽둥이와 발길질에 반쯤 파손되어 버렸고 지프는 군중들이 밀고 가서 오동동 다리 밑의 하천에 처박아버렸다. 시위 군중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 작은 승리는 군중의 기세와 사기를 크게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 군중은 완전히 흥분 상태로 돌입하였다. 이제 대중의 정신 상태는 평소의 소위 ‘정상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잠재의식의 폭발 상태로 바뀌었다. [중략] 불종거리에서 오동동 다리를 지나오는 불과 몇 분밖에 안 되는 사이 애초의 학생 시위가 민중 봉기-폭동으로 발전되는 극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시위는 이렇게 학생들의 당초 계획 범위를 크게 벗어나 거대한 민중 봉기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박영주의 기록에 따르면 애초 학생 시위를 주동했던 학생들 몇몇은 그 와중에서도 “선량한 시민들은 보호를 해주자. 학생들 외는 가담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가담하면 우리의 순수성이 없어진다. 시민들은 자제하자.”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다음날인 19일 마산에 공수 부대가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됐으나 밤이 되자 다시 창동 네거리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이날 밤 시위는 20일 새벽까지 시가지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는데, 전날과 달리 대학생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실업자와 노동자들이었으며, 고등학생들도 많이 가담했다.

20일 정오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민중들의 의로운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민중들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국내 정치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0월 26일 유신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10월 부마 항쟁은 1970년대 민주화·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1980년대 5월의 광주 항쟁과 함께 한 단계 질적으로 진전된 민족·민주 운동의 모태였다. 그리고 항쟁은 마산 시민에게는 “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자부심을 다시 한 번 심어줬다. 3·15 이후 처음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한국 민중 운동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마산 시민의 민주 정신은 3·15 의거10·18 민주 항쟁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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