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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주기철 목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5
한자 殉敎者朱基徹牧使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4년 4월 21일연표보기 - 주기철 순교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설교자·순교자·민족 운동가.

[개설]

주기철(朱基徹)[1897~1944]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시가 배출한 위대한 목회자이자 순교자였고 민족 운동가였다. 장로교 목사로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생애와 활동]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웅읍면이라고도 함] 북부리(北部里)에서 주현성(朱炫聲) 장로와 조재선(曺在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인 1906년 고향 웅천의 개통 학교(開通學校)에 입학하여 7년간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주기철은 신식 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던 이광수(李光洙)와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받고, 신교육과 서양 문화, 특히 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앙과 민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1913년 정주로 가 오산 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정주·선천·안악 그리고 평양은 민족 교육의 중심지였는데, 정주 오산 학교는 그 대표적인 학교였다. 이곳에서 주기철은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이승훈으로부터 신앙·애국 그리고 민족정신을 배우고 이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1916년 3월 오산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5년에 설립된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안질로 시력이 약해져 수학하기 어려워지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웅천으로 돌아온 그는 약 4년 반 동안 실의와 좌절의 날들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1917년에는 김해 출신 안갑수(安甲守)[1900~1933]와 결혼하였고, 후일 5남 1녀를 두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 정신은 웅천에까지 파급되었고, 주기철은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으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지명 수배를 받고 처가로 도피했으나 체포되어 헌병대에 연행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의 사촌이자 오산 학교 동창인 주기용이 웅동면 계광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1년 6개월의 형을 살았는데, 주기철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연희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웅천에서 칩거하던 주기철마산 문창 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목회자의 길을 결심했다. 1922년 3월에는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부산 초량 교회[1926~1931], 마산 문창 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에서 담임 목사로 봉사하였다.

주기철마산 문창 교회에서 시무할 당시인 1933년 5월에 부인 안갑수와 사별하였고, 2년 후인 1935년 오정모(吳貞模)와 재혼하였다. 1935년 이후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여 1938년 2월 제1차 검속 이후 약 6년간 옥중에서 투쟁하였고, 1944년 4월 21일 밤 4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신사 참배 반대와 투쟁]

일제는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으로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주기철은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일제는 1925년 조선에서의 신사 제도의 총 본산인 조선 신궁(朝鮮神宮)을 서울 남산에 건립하고 전국 각처에 신사(神社) 혹은 신사(神祠)를 건립하였다. 1925년 당시 42개의 신사(神社), 108개의 신사(神祠)가 있었으나 1935년에는 52개처에 신사(神社)가, 272개처에 신사(神祠)가 세워졌고, 1936년부터는 기독교회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사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라 동방 요배(東方腰拜), 일본 국기 게양, 황국 신민 서사의 제창 등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1923년부터 1945년까지 22년간의 신사 설립 통계를 보면, 신사(神社)는 총 79개소, 신사(神祠)는 총 1,062개소가 각각 설립되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탄압이 심화되면서 회유와 변절이 일어났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이를 수용하였고, 감리교는 1938년 9월에 신사 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장로교회 또한 회유와 탄압을 받았고,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차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일제의 강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주기철은 신사 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이 일로 주기철은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즉 제1차 구속[1938. 2.~6.], 2차 구속[1938. 8.~1939. 2.], 3차 구속[1939. 9.~1940. 4.], 4차 구속[1940. 8.~1944. 4.] 기간은 모두 5년 4개월에 해당한다. 1944년 4월13일,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졌고, 병고와 심한 고문으로 건강을 잃고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때쯤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유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주광조에게 생명 보험을 든 200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해 드리고 …….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대면했을 때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오리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그 이튿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기고 밤 9시 47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주기철의 신사 참배 반대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신사 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 숭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신사 참배는 개인의 신앙 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탄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족 독립운동]

주기철은 장로교 목사였고 목회 활동에 충실했으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기여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학교 교육, 목회 기간 그리고 그의 구금에서 순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담론(談論)은 ‘민족주의’였다. 특히 1910년 이후 식민 지배 하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적 민족주의’가 형성된다. 이 시대를 살았던 주기철 목사 또한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와 학창 시절 그리고 목회 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는 1919년의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이후에도 민족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특히 두 번째 투옥은 유재기(柳載奇)[1905~1949] 목사가 주도하던 농촌 계몽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였다. 유재기 목사는 선구적인 농촌 운동가로 1938년 배민수(裵敏洙)·김성원(金聲遠)·박학전(朴學全) 등과 함께 농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농민 협동 조합 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농우회를 단순한 농촌 운동으로 보지 않고 반일 애국 운동의 전위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주기철은 신사 참배를 반대했으나 농우회와 관련시킨 것은 그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민족 독립운동과 유관한 활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기철은 순수한 목회자였다. 그는 신앙 양심에 따라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싸웠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주기철은 건실한 장로교 목사였고 저명한 설교가였다. 동시에 그는 신사 참배에 대한 투쟁과 이로 인한 희생의 대표적 인물로 신사 참배 반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의 폭풍 아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부터 단호한 거부 입장을 표명하여 신앙을 지켰고, 이를 통해 신교의 자유를 고양하였다.

주기철은 민족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했으나, 신사 참배 반대는 민족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참된 믿음이 참된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바른 신앙의 길이 애국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신사 참배 거부는 결과적으로 민족 독립과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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