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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6
한자 鎭海-多樣-宗敎-成長-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순형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의 다양한 종교.

[개설]

종교(宗敎)란 ‘신(神)이나 초인간적·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들의 경외와 숭배, 신앙하는 일의 총체적인 체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류 문명의 출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전근대 시기 진해구의 종교 현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지만 이곳은 불교·천주교·기독교나 혹은 신흥 종교인 천리교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10년 10월 현재 창원시에 등록된 종교 현황을 살펴보면, 기독교 계열 19곳, 불교 48곳, 천주교 7곳, 기타 7곳이다.

[천년의 향기, 불교]

진해구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허황옥(許黃玉)이 장유(長遊) 화상과 함께 진해를 통해서 가야로 갔다거나 인근의 창원이나 김해에서 불교가 번성한 것을 보면 진해구도 일찍부터 불교가 번성했을 것이다.

진해에서 제일 유명한 불사는 신라 흥덕왕 시기에 무염(無染) 국사가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칠 것을 기원하며 굴암산에 건립했다는 성흥사(聖興寺)이다. 무염 국사가 법력으로 왜구를 물리치자 흥덕왕은 사전(寺田) 360결과 사노(寺奴) 1백 호를 하사하여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건립 당시 승려 5백여 명이 머물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후 수차례의 화재[1109년, 1668년]로 인근을 배회하다가 1789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성흥사에는 1976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1890년 제작되었다는 무염 화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 설화를 통해서 볼 때 성흥사는 창건 당시부터 호국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1895년에 편찬되어 일제 강점기에 필사된 『웅천현 읍지』에는 성흥사 외에도 굴암(窟菴)·서광사(西廣寺)·용원사(龍院寺)·죽림사(竹林寺)·도장암(道藏菴)·영주사(瀛洀寺)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서광사는 웅천 북쪽의 웅산(熊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옛날에는 광석사(廣石寺)라고 칭했다. 일찍이 폐허가 되었던 것을 현감 김명혁(金命爀)이 중건하여 서광사로 개칭하고, 부원군이었던 김조순(金祖淳)가 액호 제자(額號題字)하였다고 한다. 한편 경화동의 정암사는 원래 1920년대에 창원 성주사의 포교당으로 정암 마을에 설립된 것으로 1982년에 사찰로 승격되었다. 이곳에는 2005년에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진해 정암사 아미타 후불탱 및 초본’[제434호]과 ‘진해 정암사 신중탱 및 초본’[제435호]이 보존되어 있다.

진해구는 일제 강점기 군항의 설치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 건너와 직접 설립한 사찰도 많았다. 예를 들면 관음사(觀音寺)[北街 觀音山]·대광사(大光寺)[龜島町, 本派本願寺에서 파생]·일심사(一心寺)[常盤通, 東本願寺派]·선광사(善光寺)[寺町, 南禪寺]·묘법사(妙法寺)[寺町, 日蓮宗]·안국사(安國寺)[寺町, 曹洞宗]·대사당(大師堂)[未廣町, 新義眞言宗]·고야산(高野山)[南辻, 高野山派] 등이다. 일본인이 건립한 절은 대광사[현 大廣寺]를 제외하고는 해방 후에 대부분 사세(寺勢)가 쇠락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진해에서 사세를 유지하면서 적극 포교를 행하는 곳은 대광사·삼밀사·해장사 등이 있다. 특히 대광사·삼밀사장복산 공원이나 둘레 길과 인접하여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씨 뿌리다]

한반도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래한 인물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2월에 일본의 종군 신부로 진해 웅천 일대에서 활동했던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인 세스페데스(G. Cespedes)라는 설이 있다. 그로 말미암아 1993년 9월에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신부의 조선 방문 400주년을 기념해서 기념 조형물을 진해시에 선물하여 현재도 사도 마을 입구에 건립된 기념 공원 내에 놓여 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지속적이고 철저한 탄압을 하였지만 한국 천주교는 꾸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1962년 3월 교황청은 한반도 내의 모든 대목구가 완전한 자치 교계 제도를 설정한다고 발표하고, 서울·대구·광주 대목구를 대교구[관구]로 승격시켰다. 현재 진해구는 대구 관구 예하 마산 교구의 창원 지구에 소속되어 있으며, 경화동·덕산동[웅천 공소 1곳]·여좌동·용원·중앙동의 본당과 군종 교구인 해군 성당과 해군 교육사 성당이 있다.

근대에 진해에서 천주교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웅천으로 피신했던 윤봉주(尹鳳周)[요셉]라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20년대까지 진해에서는 한국인 신자가 없었는데, 1927년경에 일본인 스츠미라는 천주교 신자가 창원 안민 공소의 신자와 함께 당시 빈민촌이었던 가마니골[현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 1가의 양어장 뒤쪽 마을]에서 이명선 등 25인에게 전교하였다. 신도의 확충으로 1930년 4월에 마산 완월동 본당에서는 진해 공소를 설립하고, 1934년에는 경화동으로 이전했는데, 이것이 진해구의 공식적인 최초 교회 조직이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에는 경화 공소를 통합하여 중앙 공소가 설립되었고, 미군의 지원으로 일제 시기 안국사라는 절을 인수하여 1946년 3월에는 진해구 최초의 진해 본당을 출범시키게 된다. 지속적인 교세의 확장으로 1957년에는 안국사 절을 헐어내고 본당 건립이 추진되었고, 1965년 12월에는 경화동 성당이 분리되면서 중앙동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여좌동 성당이 1979년 1월에 중앙동 본당에서 분리되었고, 시청 이전과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건립에 따라 1992년 2월에는 덕산동 성당경화동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또한 2007년 12월에는 신항의 개발로 용원 지역이 점차 활성화되어 가자 용원 성당이 건립된다. 덕산 성당용원 성당의 건립은 진해 동부 지역 포교와 교세의 확장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2012년 현재 진해구에는 6,427가구에 1만 4453명[주민 총수의 8.24%]의 신도가 있으며, 신부 7명에 수녀 10명이 활동 중이다.

[웅천 교회의 주기철, 신사 참배 반대하다]

진해구는 비교적 일찍부터 개신교의 선교 활동이 있었다. 진해의 개신교는 김해의 장로였던 배동식(裴東植)이 웅천 1동에 거주했던 김원수(金元守)에게 전교하면서 시작되었고, 1900년 5월에 ‘웅천 교회’가 건립되었다. 1903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심익순(沈翊舜)의 선교로 교세가 확대되자 서중리의 송화여(宋和汝)가 초가지붕의 교회를 세웠다. 1913년에 김기원 목사가 초대 교역자로 부임하였고, 1918년에는 교세의 확장으로 북부리에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26년에는 김창식 장로가 북부 교회와 나누어 남문 교회를 설립했지만 2년 후에 다시 통합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개축을 거쳐 1974년 11월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웅천 교회 명의로 변경 등기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웅천 교회는 진해 개신교의 산 증인으로 지역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웅천 교회 출신으로는 주기철 목사가 유명하다. 그는 개통 학교에 입학하여 민족혼과 애국심을 싹틔웠고, 목사가 된 후인 1938년부터는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한편 경화동경화 교회[1905년], 가주동의 가주 교회[1907년], 명동의 명동 교회[1911년] 등도 진해구의 선교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경화 교회는 서울 출신의 교인 조백선(趙伯善)에게 감화되었던 덕산동의 박춘업이 하구(下龜) 마을의 신도가 증가하면서 1906년에 예배당을 건립한 것이 모태가 된다. 1910년 9월에 일제의 진해 군항 설치를 위해 마을민들이 새롭게 조성된 경화동으로 이주하게 되자 교회도 함께 이전하였다. 이후 지역의 계몽과 선교를 위해서 1935년에는 야학을 개학하고,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을 군사 시설로 한다는 계획이 변경되자 하구 마을의 원주민들이 점차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1937년 1월에 하구 교회가, 1946년에는 진해 교회경화 교회로부터 분립·독립되었다. 가주동의 가주 교회는 1907년 3월 3일 김치홍이 김해읍 교회에서 전도를 받고 가주리로 이사하여 지수호를 전도한 후에 김치홍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개척의 효시가 된다.

이 외에도 진해구에서는 1940년대까지는 여좌동제일 진해 교회[1945년], 대흥동의 진해 장로교회[1945년], 이동동부 교회[1948년] 등이 설립되었다. 6·25 전쟁 시기에도 연합군의 진해 주둔으로 1950년대는 다섯 곳의 교회가,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각각 네 곳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2010년 10월 현재 등록된 교회는 총 48곳으로 진해구의 개신교 교세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준재를 교육하고 성현을 앙모했던 유학]

진해구에서 유학 혹은 유교와 관련된 정부 단체로는 진해 향교웅천 향교 두 곳이 있었다. 진해 향교는 1413년(태종 13)에 진해현에 현감을 두면서 문묘와 함께 설치되었다. 현(縣) 읍치의 동쪽 2리에 있었던 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영조 때 재건되었고, 1909년 진해현의 폐지로 향교도 폐교되었다. 현재는 향교가 위치한 진동면이 마산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마산 향교로 명명되고 있다. 과거의 웅천현진해현과 별도의 행정 구역이었지만 현재는 진해구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웅천 향교진해구의 유학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웅천 향교와 관련해서는 1486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향교는 현(縣)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었던 것 같다. 영조 때에 현(縣)의 서쪽 1리로 이전했다가 1914년 마산부에서 창원군이 분리되면서 일제는 일군 일향교(一郡一鄕校)의 방침으로 강제 폐쇄를 결정하였다. 1915년 춘계 석전제를 마지막으로 성현들의 위패는 뒷산에 묻고, 훗날의 향사를 기약하면서 존막계(尊幕契)를 조직했다고 전한다.

웅천에서는 향교와 더불어 양사재(養士齋)가 주목된다. 신태우(申泰佑)『야은유고(野隱遺稿)』에 의하면, 고조할아버지인 신현(申眴)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경북 성주로 낙향하여 살던 내자직장(內資直長) 신영정(申永貞)의 후손으로 웅천의 여명리(餘明里)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는 웅천에 향교 외에 서원이 없고, 풍속이 비루한 것을 개탄하며 준재(俊才)를 교육할 목적으로 향교의 동편에 양사재와 강무정(講武亭)을 세워서 문무를 가르쳤다. 양사재 출신으로 등과한 자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과거제가 폐지된 후에는 양사재도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퇴하였다. 1906년 웅천에서 신식 교육이 시작되면서 여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 ‘개통 학교(開通學校)’를 거쳐서 나중에 웅천 공립 보통학교로 개편되면서 전근대 교육 기관의 기능은 상실하게 된다.

진해구의 유학과 관련하여 북부동 관정 마을에 위치한 주자 정동 강당(朱子井洞講堂)도 주목된다. 이곳은 일명 회암 영당(晦菴影堂)·주자 정동(朱子井洞)·주자 영당(朱子影堂)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곳에 봉안된 주자 영정은 1683년 청(淸)에 사신으로 갔던 홍수헌(洪受瀗)이 조선으로 가져왔던 것을 1863년에 모사하여 양사재의 별저에서 임시로 향사했던 것이다. 1876년(고종13)에 웅천 현감 김구현(金龜鉉)의 주도하에 웅천 사림들이 정동에 영정각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춘추로 사림에서 향사를 올렸다. 아울러 강당에서는 수시로 강회(講會)를 열어 후진을 향성하면서 지방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현재는 강회를 여는 강당의 기능이 쇠퇴하고, 주희(朱熹)의 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의 기능이 크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교육을 담당하던 유일한 시설로 매년 음력 3월15일과 9월15일에 향례(享禮)를 올린다. 1996년에 건물이 붕괴될 지경에 이르자 구 진해시에서 영정각과 강당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화(開花)를 꿈꾸는 신종교들]

진해구의 신흥 종교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천리교일 것이다. 교단 본부가 일본에 있는 천리교는 해방 후에 극심한 반일 감정으로 수많은 배척과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진해는 일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항이 설치되어 있어 일찍부터 천리교가 전교되었고, 여타 지역에 비해서 지금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진해구에서 처음으로 천리교 신자가 된 사람은 1923년 10월에 마산 미선(美鮮)교회의 역원이었던 김성현한테 영향을 받았던 김순염이었다. 진해 교회의 초대 교회장인 그녀는 1935년 10월에 6개월 과정인 천리교교 조선 포교 관리소(天理敎校朝鮮布敎管理所) 수양과를 31기로 수료하고, 1936년 11월 교인 등록을 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단독 포교를 개설하였고, 1953년 3월에는 진해 포교소를 설립하였으며, 1973년에는 진해 교회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이후 적극 선교 활동으로 전개하면서 3대 교회장에 걸쳐서 진해구를 비롯한 각지에서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다[교회 및 포교소 26곳]. 진해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당의 건물은 일제 시기 107 공양탑으로 유명한 덕환 관음사의 건물이다. 일설에 이 건물을 건조할 때 러시아로부터 붉은 벽돌을 들여와서 지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교당의 건물이 노후하고 곳곳이 누수가 진행되고 있어 교인들의 결의로 2014년에 이곳에 새로운 교회당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반면 진해구에서 최초의 포교소는 1936년 2월에 인가되었던 경선(慶鮮) 선교소일 것이다. 원래 최문익은 부인 추말순의 권유로 입교하여 1929년에 경남 충무에 단독 포교소를 설립하였다가 마산 미선 교회 초대 교회장인 김선장의 권유로 진해 경화동으로 교단을 이전하였다. 1938년에 추말순이 제2대 교회장으로 취임하고, 1949년 4월에는 경선 교회로 승격되었다[교회 및 포교소 5곳].

현재 비교적 큰 교세를 형성하며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고 있는 교회는 석동에 있는 동광(東光) 교회이다. 동광 교회는 배대동이 1941년에 처음으로 입교하여 1955년 2월에 진해구 광화동에 동광 포교소를 개설한 것에서 출발한다. 1958년 4월에는 천리교 한국 교단으로부터 교회 승격을 받았고, 1979년 7월에는 천리교 본부로부터 동광 교회라는 명칭을 받았다. 동광 교회 예하에는 진해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교회 및 포교소 18곳이 활동 중이다[교직자 총 138명, 전체 신도 3,000명]. 동광 교회에서는 선교의 일환으로 일찍부터 동광 유치원을 운영했는데, 1990년대에 안민 터널이 개통되면서 유치원이 폐쇄되었다.

해방 후 천리교는 왜색(倭色) 종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꾸준히 천리교의 한국화를 시도하여 왜색 종교라는 비난과 지탄을 면하고자 노력하였다. 진해에서도 동웅동 교회[1950년], 경화 교회[1963년], 한국 천리교 경남 교구[1996년] 등이 개설되어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진해구에는 다양한 신흥 종교들이 활동 중이다. ‘통일교 진해 가정 교회’는 1956년 6월에 정성원이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1972년에 김동춘이 현재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1982년에 2층의 교회를 신축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국 천부교 진해 교회’는 진해구 태백동의 언덕 위에 건립되어 있다. 제3회 전국 전도관 체육 대회[1957. 10. 22.~10. 24.]에서 진해팀이 3위를 차지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천부교의 진해 진출은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진해 중앙 교회’는 6·25 전쟁 중에 미군들이 진해에 주둔한 영향으로 비교적 빠른 1951년에 진해구 창선동에 건립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는 1970년대에 황효연이 처음으로 접하고, 1980년대 초에 교회를 설립하여 현재 진해구 풍호동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 중이다. 또한 진해구 여좌동에는 민족 종교를 지향하는 강일순이 중심이 되는 ‘증산도 진해 여좌 도량’이 있으며, 석동에는 ‘여호와 증인의 왕국회관’이 마련되어 선교 활동 중이다.

[나오면서]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면서 바다와 접하는 진해는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가 공존하였다. 지형적으로도 양항(良港)이 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 시대는 일본에 개항되었던 삼포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큰 제포(薺浦)가 바로 웅천에 있었고, 일제는 대륙 진출을 위해서 군항을 설치하였다. 6·25 전쟁 시기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들이 주둔하였고, 그 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장병들이 운집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진해구는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면서도 융화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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