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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34
한자 -馬山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희욱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 씨름의 발자취와 선수들의 활약.

[1960년대 마산 씨름의 발자취]

씨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예의 하나로 두 사람이 샅바나 띠 또는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먼저 땅에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민속놀이이자 운동 경기이다. 시대에 따라 각저(角觝)·각력(角力)·각희(角戱)·상박(相撲) 등으로 불린 씨름은 일제 강점기에도 마산 지역에서 활발하게 행하여 왔다. 광복 직후에 결성된 마산 씨름 협회는 전 마산 씨름 대회 등 많은 씨름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마산 씨름계에서는 전팔용·박명규·배용찬 등이 약 10년간 장사로 통하였다. 마산 씨름계는 1964년 제3회 도민 체전에서 진주·울산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초중반에도 여전히 마산 씨름 대표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하였다. 1961년 11월 전주 중앙 구장에서 개최된 전국 장사 장군 씨름 대회는 칭호를 부여하는 대회였는데, 마산의 박영식이 1위를 차지하여 장사 칭호를 받았고, 5위의 박두진도 선사 칭호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도시 대항 경기에서 마산 씨름 대표단이 우승함으로써 마산 씨름의 높은 수준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마산 씨름 협회가 3·15 기념탑 제막 기념 제1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를 마산 시청 뒤편 해안 광장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비록 서울 선수들은 사정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1백여 명이 참여하여 경기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에도 마산 씨름단은 각종 전국 대회에서 대활약을 보였다. 1964년 8월에 김천 체육회가 주최한 전국 남녀 장사 씨름 대회에서 우승하였고, 김천에서 대한 씨름 협회 및 경향 신문사 주최로 개최된 제2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1965년 8월11일~15일)에서도 단체 도시 대항전은 물론 개인전에서도 1위부터 3위까지 휩쓸었다. 또한 1965년에는 마산 씨름 협회가 주최한 제2회 천하장사기 쟁탈 전국 장사 씨름 대회[11월 24일~28일]가 마산 3·15 회관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는데,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마산이 휩쓸었다. 1966년 11월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0회 대통령기 쟁탈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의 도시 대항전에서 마산 씨름 선수단은 우승을 차지하면서 꾸준히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에 마산 씨름계는 오랫동안 마산 씨름을 대표해 오던 모희규 등이 직장 문제로 속속 타 시도로 이동해감으로써 위기가 닥쳤다. 뿐만 아니라 경남 협회와 관계 설정에 어려움이 있어 마산 협회의 임원진은 많이 약화되었다. 경남 씨름 협회는 부산이 직할시가 된 1963년에는 진주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에 울산으로 협회가 옮겨갔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성률 장사의 출현으로 마산 지방에 다시 씨름 붐이 일어나면서 1973년 4월에 경남 씨름 협회는 마산으로 옮겨오는 곡절을 겪었다.

[마산, 한국 씨름의 메카로 자리 잡다]

1960년대 후반 마산 씨름계가 침체에 빠지려 할 때 김성률이 출현하여 전국 씨름계를 10여 년간 평정하면서 마산을 다시 씨름의 도시가 되게 하였다. 그는 1967년의 전국 장사 씨름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에, 약 10년간 모래판의 전설을 만들어 냈다. 김성률은 탁월한 성적만이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기술 씨름을 창안하여 한국 씨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2004년부터 학산 김성률배 전국 장사 씨름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948년생인 김성률마산 창동에서 태어나서 마산 성호 초등학교, 마산 중학교, 마산 상고, 마산 대학[경남 대학의 전신]을 거쳐 경남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마산 토박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외삼촌의 권유로 씨름을 하였고, 또 형의 영향으로 유도를 배웠을 뿐 아니라 초중 시절에는 축구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씨름 성적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온 것은 1962년의 3·15 기념탑 제막 기념 제1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에서 중등부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였다. 그렇지만 그가 정식으로 씨름 선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마산 상고 2학년 때였다. 그는 나중에 일양 민족 씨름단 감독이었던 권영식, 마산 상고 선배인 씨름 선수 김성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씨름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성률은 비교적 씨름 입문은 늦었지만 어려서부터 유도·축구 등으로 몸이 단련되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놀라운 속도로 씨름 실력을 늘려갔다. 그리하여 1964년에 마산 씨름 대표 선수단에 합류하여 전국 각지의 씨름 대회에 마산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1965년 김천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 개인전에서 쟁쟁한 성인 역사들을 물리치고 3위를 차지하였고, 마산 씨름 협회가 주최한 제2회 천하장사기 쟁탈 전국 장사 씨름 대회에서는 4위를 차지하였다. 고등부 개인전에서 그가 1위를 차지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1956년에 창단된 마산 상고 씨름부는 김성률의 활약으로 1964년의 대통령배 쟁탈 전국 장사 선발 및 제18회 씨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1966년에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0회 대통령기 쟁탈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 고등부에서 우승하는 등 1960년대 중반에 전국 최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김성률마산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한국 씨름사에서 ‘김성률 시대’를 열게 된다. 그는 1967년에 민주 공화당 의장배 전국 장사 씨름 대회에서 박두진·강기영·박범조 등의 선배들을 누르고 한국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마산 대학 씨름단의 김성률·백승만·이채하·정근종·천평실·황경수 등이 1967년에 동시에 39사단에 입소하여 부산 기지 사령부 병기 기계 공작창 씨름단으로 활약하게 되다. 그 때에도 김성률은 1969년에 주간 경찰 신보 대구 지사가 주최한 제1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 장사부에서 장사 우승컵을 차지하는 등 1969년에 개최된 3번의 대회에서 전부 우승하면서 명성을 구가하게 된다.

1970년 4월 제대 후 6명이 동시에 마산 대학에 입학·편입하게 되었고, 마산 대학생들이 일반부로 6~7년간 출전하면서 전국 체전과 전국 대회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1972년에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는 소장급 황경수, 청장급 천평실, 용사급 백승만, 역사급 정근종, 장사급 김성률이 출전하여 전 체급에서 우승함으로써 씨름판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김성률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2년에는 한국 씨름계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장충 체육관에서 대한 씨름 협회와 KBS가 공동 주최하고, 문화 공보부가 후원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 장사 씨름 대회였다. 그 이전까지 야외 모래판에서 실시되던 경기가 실내의 매트에서 진행되었고, 3일간의 경기 내용이 KBS TV가 전국으로 중계 방송하여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자극하였다. 경기가 열렸던 장충 체육관에는 당시 인기 종목인 구기 종목의 국제 대회에서도 관중이 1,000~2,000명 정도였지만 씨름 대회가 개최되던 연 3일 동안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 전국에서 모여든 관중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예선을 거친 8명의 장사가 풀 리그전으로 거행된 이 대회에서 김성률은 거구인 경북의 박범조를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74년에 개최된 제3회 전국 장사 씨름 대회에서 15전 전승으로 승리하기도 하였다. 김성률이 주요 대회에서 거둔 성적을 보면, 1970년 제7회 대통령기 전국 장사 씨름 대회 때부터 1977년 제14회 대회 때까지 8년 연속 장사부 1위, KBS배 전국 장사 씨름 대회 4연패,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 장사급 4회 우승 그리고 회장기 전국 장사 씨름 대회 장사부 2회 우승 등 196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 모래판의 전설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모래판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김성률은 1975년에 개최된 제27회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하던 홍현욱에게 패하고 말았다. 김성률이 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 대단한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김성률은 얼마 안 가 씨름 선수로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씨름 행정, 연구 및 후진 양성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는 1975년에 경남 씨름 협회가 행정의 공백기를 맞이하였을 때 김성수 전무와 함께 씨름계를 이끌기도 하였다.

김성률경남 대학 사범 대학 체육 교육과에서 이만기와 이승삼 등 쟁쟁한 선수들을 길러냈다. 그 중에 이만기는 “제가 걸어온 길은 김 장사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온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김성률의 제자인 이만기는 1983년의 제1회 천하 장사 씨름 대회에서 김성률을 꺾고 주목을 받았던 홍현욱을 물리치면서 다시 한 세대를 풍미하게 되었던 일은 인연 치고도 묘한 인연이었다.

1973년에는 김성률의 활약상에 감동을 받은 마산의 뜻있는 인사들이 ‘김성률 체육관 건립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기금 부족으로 난관에 처했을 때 김성률은 체육관 건립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기도 하였다. 1976년 7월에 삼성 라디에이터 사장인 고진규 경남 탁구 협회 회장이 체육관 건립을 위하여 2백만 원을 희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숙원 사업은 1990년에 비로소 마산시의 협조를 받아 마산 씨름 체육관을 완공하게 된다. 마산 씨름 협회는 2004년 7월에 마산 서원곡 종합 체력장 2층에 유물 기념관을 개관하고, 김성률의 현역 시절 사진과 우승 트로피, 우승기 등 1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여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한국 씨름계의 ‘모래판의 전설’이라 불린 김성률을 기리기 위하여 2004년 6월에 제1회 학산 김성률배 전국 장사 씨름 대회가 마산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초·중·고·대·일반부로 나뉘어 무려 247개 팀에서 3천여 명이나 참가한 초대형 씨름 대회였다. 그러나 이 대회를 불과 보름 정도 앞둔 2004년 5월25일에 김성률 장사는 심근 경색으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산 씨름의 현장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마산 씨름은 김성률 같은 걸출한 인재들 덕분에 학생 부문에서도 전국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58년에 창단된 해인 대학 씨름부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전국 최강팀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1962년에 열린 제16회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에서 마산 대학은 강호 경희대를 5:0으로 완파하고 우승하였다. 마산 대학의 위력은 김성률이 재학 중이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마산 대학 씨름 선수로는 김성률 이외에도 역사급의 임영만, 소장급의 권영식, 청장급의 천평실 그리고 황경수·백승만·정근종·이채하 등 초호화 멤버들이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1971년 이후에 경남대 씨름부는 한 동안 큰 성적을 올리지 못했으나, 1981년에 개최된 제11회 회장기쟁탈 전국 장사 씨름 대회 대학부에서 영남대를 5:2로 누르고 이 대회 첫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옛 실력을 과시한 바 있다.

1956년에 창단되어 전국적인 고등부 씨름의 대명사가 된 마산 상고 씨름부는 김성률이 활약하던 1960년대 중반에 전국 최강의 자리에 있었다. 마산 상고는 1973년에 개최된 우수 고교 초청 리그전에서는 용문고와 나란히 4승 1패를 기록했으나 승자승 원칙에 따라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마산 상고는 1970년대 들어 한동안 진주 상고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79년에는 전국 체전 준우승, 1980년에는 전국 체전 3위 등으로 재기의 기미를 보였으며, 1981년에는 제20회 도민 체전에서 라이벌인 진주 상고를 4:3으로 격파하고 경남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제11회 회장기 쟁탈 전국 장사 씨름 대회 고등부 결승에서 강적 부평고를 4:3으로 누르고 우승하여 전국을 재패하면서 1981년에만 전국 대회를 두 번이나 평정하였다. 당시 마산 상고 씨름부에는 천하장사가 될 이만기가 주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마산 상고 씨름부는 그 창단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김성률·이승삼·이만기·강호동 등 수많은 우수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이만기는 1963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하여 모리 초등학교 4학년 때 장조카와 같이 마산으로 왔다. 그는 전학 와서 담임 선생님이 특활반에 들라고 하여 장조카와 함께 엉겁결에 다른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는 씨름반에 배정된 것이 씨름을 하게 된 계기이다. 그 당시 씨름 종목이 소년 체전에 채택되면서 학교에서 특활반 아이를 학교 대표로 육성을 한 것이다. 이만기는 체구가 작아 주로 낮추는 씨름을 연습했다. 씨름 기술을 보면 낮춤 씨름과 들어 넘기는 씨름이 있는데, 당시 이만기는 덩치가 작아 낮춤 씨름이 주기술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키도 크고 몸무게도 늘어나면서 다시 들어 넘기는 씨름을 하면서 두 가지 기술을 다 갖추게 되었다. 뒷날 TV해설자는 “이만기는 만 가지 기술을 다 쓴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씨름의 기술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천하장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기 체급에서 2~3위 정도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여름 전국 대회에서 처음으로 8강에 들었고, 대학 2학년을 맞이하는 겨울 방학 동계 훈련을 제대로 보내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하였다. 때마침 국민들의 폭발적인 인기 속에 프로 씨름 대회가 출범하면서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제1회 천하장사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무명의 풋내기 씨름꾼에 불과한 그를 일약 ‘모래판의 차세대 주역’으로 바꿔놓았다. 대회 직전까지 매스컴과 씨름계에서는 홍현욱·이준희·최욱진·이봉걸 등 기라성 같은 당대 씨름판 거목들을 우승 후보로 지목했을 뿐 전국 규모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한 적 없는 그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날 천하장사 결정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체급제한 없이 토너먼트로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이만기는 준결승에서 이준희를 맞아 잡치기와 호미걸이로 2:1 역전승을 거두었고, 결승에서도 ‘모래판의 여우’로 불리던 최욱진을 접전 끝에 3:2로 누르고 ‘원년 천하장사’가 되었던 것이다.

체력과 테크닉. 승부근성 등 삼박자를 고루 갖춘 그의 장사 등극은 과거 힘이 지배하던 씨름판에서 힘과 기술이 조화된 씨름판으로 전환을 앞당겨 프로 씨름 중흥에 기폭제가 됐다. 연속 기술에 능하고 배지기가 특기인 그는 5개월 뒤에 열린 2회 천하장사 대회에서도 홍현욱을 3:0으로 제압하며 천하장사 2연패를 달성하면서 ‘이만기 시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마침내 1989년 제16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통산 10번째 천하장사에 오르며 ‘모래판의 황제’로 우뚝 섰다. 1983년 민속 씨름 출범 이후 1990년 은퇴 때까지 천하장사 10회, 백두 장사 18회, 한라 장사 7회 등 정규 대회에서만 35개 타이틀을 휩쓸었다. 통산 전적 333전 287승 46패, 86.2%의 승률은 지금껏 깨지지 않는 프로 씨름사의 신화와 같은 기록이다.

이만기 보다 선배 중에는 이승삼·구봉석·신영태 등이 있었다. 털보 이승삼은 뒤집기의 명수로 이름을 떨쳤는데, 한라 장사 세 번, 천하장사 2등을 두 번 차지하였다. 그는 같은 현대 소속의 이만기에게 한 번, LA 미주 천하장사에서 이봉걸에게 져서 아깝게 천하장사는 차지하지 못하였다.

구봉석의 경우는 작아도 씨름을 뛰어나게 잘 하였다. 1983년 대학 4학년 때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와 그 해 가을에 전국 체육 대회에서 각각 경장급 1위를 차지하였다. 경남 대학 졸업 후 부산 공동 어시장 선수 때 프로 씨름 대회에서 진주 경상 대학교 김태호[대학 졸업 후 같은 현대 팀 선수로 활약]에게 3:0으로 이겨 첫 태백 장사를 획득한 후 두 번째는 같은 대학교 후배인 이희윤[대학 졸업 후 같은 현대 팀 선수로 활약]에게 3:2로 이겨 역시 태백 장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체급이 바뀌어 금강 장사급에서는 이희윤에게 3:1로 이겨 금강 장사로 등극했다. 그는 태백 장사 두 번, 금강 장사 아홉 번을 차지하여 사실 천하장사에 가려 빛이 나지 않았지만 작은 체급에서도 뛰어난 기량으로 우수한 성적을 남긴 선수이다.

같은 동료인 신영태도 초등학교 때 태권도를 하다가 씨름으로 전향하여 태백 장사를 차지하였다. 또한 이희윤은 창원에서 씨름하러 마산에 갔다가 마산 중, 마산 상고[현 용마고], 경남 대학교, 현대 중공업에 이만기와 같이 동고동락한 동료로 사실상 초·중·고 때까지는 이만기가 이희윤을 잘 이지지 못했다고 한다. 이만기가 천하장사가 되고서도 이희윤과 연습 경기를 할 때면 꼭 첫째 판은 이희윤이 이길 정도로 기량이 우수하였다. 이희윤은 태백 장사 두 번, 금강 장사 세 번을 차지할 정도로 잘하였다.

[참고문헌]
  • 『마산시 체육사』(마산시, 2004)
  • 『마산 시사』(마산 시사 편찬 위원회, 2011)
  • 『부산 일보』(1999. 12. 9.)
  • 「도민 체육 대회 프로그램」(경상남도 체육회)
  • 인터뷰(씨름인 정근종, 2013. 9. 2.)
  • 인터뷰(씨름인 천평실, 2013. 9. 2.)
  • 인터뷰(인제 대학교 교수 이만기, 2013. 9. 2.)
  • 인터뷰(창원시청 씨름 감독 이승삼, 2013. 9. 2.)
  • 인터뷰(마산 JC 회원 이상일, 2013. 9. 3.)
  • 인터뷰(울산 성신 고등학교 체육 교사 구봉석, 2013.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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