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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려산 신감 마을 사람들의 숯일과 지난한 삶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37
한자 匡廬山新甘-至難-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정헌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신감리 신목 마을의 숯 일과 숯꾼들의 삶.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광려산(匡廬山) 자락에는 17세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 초반까지 숯을 만든 숯 굴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 글은 직접 숯 일에 참여한 고증인의 증언을 중심으로 숯 굴 제작 과정과 숯 일의 고단함, 일화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광려산 자락을 중심으로 인근의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산 등에는 아직까지도 조선 후기 숯 일을 하던 숯 굴 터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숯 일에 직접 참여한 이들이 거의 생존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숯 일을 고증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고증인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숯 일이 천시 받는 일이었다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깊어 자신의 신분을 쉽게 밝히기를 꺼려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내서 전통 민속 문화 예술 보존회’를 설립하여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백종기 선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백종기는 숯 일에도 관심을 가져 1997년부터 몇 기의 숯 굴 원형을 복원하였으며, ‘내서 숯꾼 일 소리’로 각종 민속 경연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광려산 신감 마을의 환경]

광려산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함안면·산인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 밑에 이루어져 있는 자연 마을은 신목·신감·전안·삼계·안계 등이 있다. 이 산자락 제일 위에 위치하고 있는 신감(新甘) 마을[일명 절골 마을]은 예로부터 미맥을 주식으로 임산물 및 화목(火木)을 채취하여 생계를 이어왔다. 절골 마을은 이름 그대로 광산사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직도 마을 일대 야산과 경작지는 사찰 소유 토지들이 산재하고 있어 애초에 사하촌(寺下村)에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또 이 마을 형성 유래에 대한 설명으로 곡내(谷內)에서는 감천이 먼저 조성되고, 이어서 이 동리가 새로운 마을로 형성되었다 하여 새로운 감천, 즉 신감으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는 구전(口傳)을 통해 볼 때 신감 마을은 17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농토라고는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갈고 넓은 땅이 아닌 반달 같은 전답을 이루고 산을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척박한 곳이다. 골이 깊고 울창한 산림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땔감과 산채, 숯 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갖고 있다. 천연적인 지형 조건에 순응하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면서 힘들게 살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체 경지 면적 중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소수에 불과하여 척박한 밭을 일구며, 땔감을 이웃 마산 등지에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 마을 사람들이 광려산을 의지하여 힘든 숯 일에 매달려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숯 일은 마을 공동체 혹은 협동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다. 숯 일 전체 과정은 남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마을 여성들은 주로 밭일과 약초, 화목 채취 등의 일에 종사하였다.

광려산 신목 마을 쪽에는 숯 굴 터가 16기 발견되었으며,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양촌 마을에도 10여 기 소재하고 있다. 이 마을은 6·25 전쟁 이전까지 33가구 100여 명의 청·장년층이 숯 일에 종사하였는데, 이즈음 마을 사람들은 숯 일을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

[숯 굴의 종류]

광려산에서 숯 일을 시작한 시기는 1700년대 후반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숯 일에 대한 고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광려산과 이웃한 함안군 여항면 등지에서 숯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상업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로 파악된다. 민간에서는 화목(火木)의 부산물로 숯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집안에서 필요한 소량의 숯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광려산 숯 굴의 형태는 크게 눌 숯 굴과 설 숯 굴이라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눌 숯 굴은 숯 굴의 모양이 ‘누워 있는’ 것으로 이 숯 굴의 크기는 3.3㎡ 남짓하여 비교적 작은 형태의 숯 굴에 해당한다. 이 숯 굴은 벌목한 나무를 세우지 않고 차곡차곡 눕혀서 쌓는다. 숯감은 지게로 4~5짐 정도의 나무가 들어가는 소규모이며, 숯도 비교적 단기간에 만들어진다. 1~2일 정도 불을 지피면 숯이 완성된다. 이 숯 굴의 조성 방법도 단순하다. 숯감을 눕힌 후 위에 흙과 풀[草]로 덮은 다음 불을 지핌으로써 자연스럽게 재여 있는 숯감 주위에 둘러 싼 흙과 풀이 내려앉아 입구를 막아 서서히 타들어 간다. 5~6일 정도면 완성되어 숯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돈이 급하게 필요한 경우나 숯을 급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숯을 내는 방법이다. 물론 숯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많은 양의 숯도 생산할 수 없다. 그런데 이곳 숯꾼에 의하면 눌 숯 굴 형태가 숯 굴의 원초적인 형태라고 진술한다.

또 다른 숯 굴 형태는 설 숯 굴이다. 설 숯 굴은 나무를 키대로 재는 방식의 숯 굴이다. 즉 숯감을 세로로 잰다. 숯 굴의 규모가 크며, 숯의 생산량도 눌 숯 굴에 비해 많다. 숯 굴은 대·중·소로 나뉘기도 한다. 숯의 생산 기간도 눌 숯 굴에 비해 오래 소요된다. 남아있는 광려산 숯 굴의 형태는 거의 대부분 설 숯 굴이다. 현재 광려산 자락에는 눌 숯 굴 터는 발견할 수 없다.

[설 숯 굴의 조성]

숯을 내는 처음 과정은 숯 굴을 만드는 작업이다. 숯 굴은 숯감을 구하기가 용이하고 바람을 잘 타지 않는 곳이어야 하며, 바위도 많지 않아야 하고, 물을 구하기가 용이한 개울가 등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곳이 숯 나무를 구하여 이동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숯 굴을 만들거나 보수하기에도 쉽기 때문이다. 또한 숯을 꺼낼 때 불티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위험을 감소시키는 데도 이러한 위치가 필요했다.

숯 굴을 만드는 날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개 손이 없는 날을 택한다. 한 기의 숯 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섯 명이 작업을 할 경우 장소가 좋은 곳이면 10일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가 소요되며, 바위가 있다든지 물이 많은 곳일 경우 2~3개월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다. 숯 굴의 조성은 추운 겨울과 여름철 우기는 피한다. 적당한 숯 굴 터가 정해지면 그곳에서 개토제를 지내는데, 숯 굴 주인이 혼자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별한 제수는 마련하지 않으며 막걸리 한 잔과, 땅에 나무를 꽂아 명태를 매달고 절을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치른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숯 굴 만들기에 착수하게 되는데 땅을 파서 돌과 흙으로 둥글게 벽을 세워 몸통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하여 바닥과 입구, 아궁이, 연통, 숯 굴 등의 작업 순으로 진행된다. 광려산 내곡(內谷)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광려산 제1호 숯 굴의 크기는 현재 발굴한 숯 굴 중에서 가장 큰데, 몸통 부분의 높이는 숯 굴 전면·중앙·후면이 각각 160㎝, 190㎝, 180㎝이며, 숯 굴 내부의 크기는 가로 최대 거리는 315㎝, 세로 최대거리는 345㎝에 이른다. 입구의 크기는 가로 60㎝, 높이 110㎝이며, 아궁이의 크기는 가로 32㎝, 높이 40㎝ 정도이다.

반면 광산사 입구에 조성한 숯 굴은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 중간 크기의 숯 굴이다. 이 숯 굴의 입구 크기는 가로 57㎝, 높이 120㎝ 정도이며, 불구멍인 아궁이의 크기는 가로 40㎝, 높이 46㎝ 정도이다. 물론 이 아궁이와 입구의 크기가 숯 굴의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을 통하여 약 15일 가량 불을 지핀다. 몸통 부분은 5㎡ 정도이며. 높이는 170㎝ 정도이다. 이 경우 나무는 40짐 정도 쌓을 수 있는데, 생산되는 숯의 량은 7.5㎏ 정도가 된다.

숯 굴을 만드는 작업 중에서 숯 굴 등[背]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힘들며, 숯 굴이 잘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요건이 되기도 한다. 숯 굴의 몸체 부분이 완성되면 비로소 숯 굴 내부에 나무를 촘촘하게 세워서 쌓은 다음 빈 공간이 없도록 사이사이에 나무를 박고, 빈틈이 없도록 나무 조각·짚·나뭇잎 등을 깔아 그 위에 차진 흙을 덮고 ‘따딤질’ 매로 쳐서 숯 굴 등을 만든다. 숯막 일꾼들이 모두 여기에 올라가 매로 초벌·애벌·세벌을 두드려 다지는데 이것을 ‘숯 굴 등치기’라고 한다. 숯 굴 등치기를 하면서 노동의 고통과 지루함을 덜기 위하여 불렀던 노래가 ‘내서 숯꾼 일 놀이’에서 전승되고 있다. 원래는 일정한 가사도 없으며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변개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이며, 일정한 리듬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숯 굴 주인이나 소리를 구성지게 잘 하는 사람이 앞소리를 하면 매를 치는 사람이 뒷소리를 하는 선후창으로 불려진다. 가사의 내용은 즉흥적으로 개작되나 이 지역의 마을이나 산의 지명 등을 많이 담고 있다. 이 과정은 숯막 일 중에 가장 힘든 과정이며, 등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등치기를 해 만든 숯 굴 등은 한 번 숯을 꺼내고 난 다음에도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므로 처음 숯 굴을 조성할 때만 만든다. 무너지면 그때그때 보수해서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숯 굴 등은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 가장자리가 낮고 중앙이 볼록하게 올라가 있는 거북이 등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좋은 숯 굴은 숯 굴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숯 굴의 수명을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다. 등에 얹히는 흙은 잘 반죽해야 하며 물기가 많아 흙이 물러서도 안 된다.

숯 굴 등을 만드는 데 보통 다섯 명 정도가 공동으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최초 10~15㎝ 정도의 흙을 ‘따딤질’ 매나 곰배를 이용하여 두드리고 다져서 5㎝ 정도가 되도록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흙이 붙지 않고, 내·외부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할 수 있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숯 굴 등은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 파손된 부분은 수리하여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벌목을 하여 바로 화목을 숯 굴에 넣어 불을 지펴 숯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완성된 숯 굴에서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숯을 생산해 낸다.

완성된 숯 굴은 습기가 차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데, 특히 겨울철에는 잘 얼어터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숯 굴이 완성되어 첫 불을 지피는 날에는 고사를 지내게 된다. 기제사나 동제와 동일한 모양새를 갖추어 진행된다. 제물은 재력이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집안 형편에 따라 달리 마련한다. 돼지머리·돔·떡·전 등을 고루 갖추어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술과 명태만으로 간단하게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원도 숯 굴 주인과 가족만 참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간혹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 있으면 초청하기도 하였다. 고사 시간을 정하는 경우도 거의 없으며, 축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산신령님 사고 없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숯을 잘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정도로 간단하게 끝낸다.

[숯감의 선택과 벌목 과정]

좋은 숯은 계절과 나무의 종류, 불 때기의 기술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소비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1년 내내 숯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좋은 숯이 만들어지는 계절은 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철과 단풍이 떨어지기 직전의 가을철에 만드는 숯이라고 한다. 또 숯의 재료인 화목(火木)도 10년 이상 된 물푸레나무나 쪼개나무, 박달나무 등 최상의 숯감이었다고 한다.

광려산에서 만들어진 숯은 그래서 최상의 숯은 될 수 없었다. 자생하는 수종(樹種)도 다양하지 못했고, 좋은 숯 재료를 얻기 위하여 10년 이상 기다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1년 내내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광려산에서 생산되는 숯의 재료는 대부분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빨리 연소되기 때문에 결코 상품(上品)의 숯은 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 역시 다른 잡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되었다.

나무를 벌목하는 일도 고된 일이다. 이른 새벽녘에 산에 올라 해질 무렵까지 하루 종일해야만 한다. 벌목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수종을 선택하고 자르고 운반해야만 한다. 산에 올라 벌목을 하기 위해서 특별히 갖추는 것도 없다. 신발은 주로 미투리가 고작이었으며, 이것이 헤어지면 짚신 위에 칡넝쿨을 감아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벌목 도구로는 주로 거두·나다·지게·바자리·도끼 등이 사용되었다.

벌목한 나무를 숯 굴까지 쉽게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산에 나무를 운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큰 나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굴리거나 끌어서 쉽게 숯 굴까지 옮길 수가 있으며, 작은 나무의 경우 던져서 옮기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숯 굴 밑에 위치하는 화목의 경우는 지게로 직접 운반하거나 들어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광려산 벌목일의 경우 목도는 아예 불가능했다.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산의 경사도가 매우 심한 것도 그 이유이다. 숯의 재료로 사용되는 나무는 주로 벌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나무를 많이 쓰는데, 그것은 마른나무일 경우 너무 빨리 타버리기 때문에 질 좋은 숯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숯감을 선택하고 벌목하여 숯 굴로 운반하여 적당한 크기로 자르는 작업 기간만도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러한 힘든 작업에 부녀자들이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부녀자들은 주로 밭일을 담당했으며, 숯 일에는 자질구레한 허드렛일이나 새참을 준비하는 등에만 참여하였다. 광려산 숯 일은 순전히 남성들의 몫이었다. 여름철 장마 기간이나 힘든 지형이 아니면 이 작업은 혼자서 3~4일 정도 소요되었다.

[나무 넣기와 불 때기]

숯 굴을 흙담으로 쌓아서 숯감을 차곡차곡 세워서 채우고 숯 굴 등을 만드는 과정은 많은 인력과 품이 필요한 작업이다. 숯감 넣는 일, 숯 굴 등을 만들어 치는 날이면 이웃 숯 굴의 숯꾼들과 동네에서 삯꾼들을 불러 함께 작업하기도 하였다. 보통 열 명 내외의 인원이 참여해야 하루에 끝낼 수 있다. 이러한 작업량을 혼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큰 숯 굴의 경우 들어갈 수 있는 숯 나무는 수백 짐이었다고 한다. 현지 조사한 숯 굴의 크기는 16.5㎡ 정도의 규모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나무의 양은 4톤 트럭 2대 반 분량에 해당된다.

벌목한 나무를 숯 굴 주변으로 운반한 이후에는 숯 굴에 나무를 넣게 된다. 한 곳에 모아진 나무들은 차례차례 숯 굴에 넣는 것이 아니라, 숯 굴 옆에 나무를 일렬로 재서 먼저 들어갈 나무와 나중에 들어갈 나무를 구별하여 넣는다. 나무의 길이는 다섯 종류 정도인데, 숯 굴에 넣는 나무의 크기는 보통 숯 굴 높이에 맞추어 자른다. 큰 숯 굴의 경우 길이 180㎝에 끝동 지름이 6~15㎝ 정도의 것이 좋다. 나무는 숯 굴 중앙에 가장 좋은 나무를 넣고, 끝동 부분을 아래로 하여 빽빽하게 채운다.

숯 굴의 입구 쪽에는 크기가 작거나 토막 난 것을 차곡차곡 채워준다. 나무 넣기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속이 썩은 나무가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지붕과 세운 나무의 공간에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는 화목으로 채운다. 나무는 거꾸로 세워서 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불길이 위에서부터 밑으로 향함으로써 밑둥치에서 많은 양의 숯이 생산되며, 이것은 불이 위에서부터 점차 밑 부분으로 옮겨지면서 타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아궁이 바로 앞에는 큰 나무를 세워놓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서서히 오래도록 소성시켜 숯을 생산하고자 하는 지혜였다.

불쏘시개로 사용되는 나무를 이 지역에서는 ‘불나무’라고 한다. 이 불나무는 숯을 만들 수 없는 나뭇가지나 잔가지를 주로 사용하였다. 숯 굴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마른나무들도 많이 사용되었다. 가능한 한 많은 숯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비록 작은 화목이라도 숯 굴 안에 넣어 숯을 만들어 판매해야 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큰 나무를 넣으면 오랫동안 타서 자주 불을 피울 필요가 없어 용이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정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불쏘시개가 너무 빨리 타서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불은 숯 굴 주인이 대부분 맡아서 한다. 기술과 경험이 가장 요구되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30시간 정도 불을 때는데, 숯 굴 안의 화목은 촛불이 타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타 내려오게 된다. 숯 꾼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숯 굴 내부의 불길 온도를 판단하였다. 콩죽같이 연기가 노르스름하면 불이 화목에 붙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또 연기 끝이 퍼졌다고 한다. 창솔 구멍이 있는 경우 가마 안의 불길의 방향, 강한 정도 등을 파악할 수 있어 불을 쉽게 가늠하여 조절할 수 있다. 불을 지핀 지 3일이 경과되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잘 주시해야 한다. 노란 빛이 나타나면 비로소 불 때기를 그치게 된다. 이후에는 숯 굴 안의 나무는 스스로 소성하게 되는 것이다. 불을 지핀 후 3~5일 정도 경과하면 숯을 꺼내게 된다. 여기에서도 고도의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만약 빨리 숯을 꺼내면 숯이 물러서 화력도 세지 않고 빨리 연소되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내서 숯 일 소리 중 “굴뚝에 불이 올라온다. 고만 붙이세, 굴뚝과 아궁이를 막아라, 숯 굴에 3일간 불을 때면 굴뚝에서 불이 올라온다. 불이 굴뚝으로 올라오는 것은 숯 나무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숯 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알게 되면 굴뚝과 아궁이를 흙으로 막는다. 1주일을 막아두면 숯 나무에 붙은 불이 저절로 꺼지게 된다.” 부분이 있는데, 이 노래를 ‘불미 소리’라고 하며 불 때기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목을 넣은 후 숯이 완성되어 나오는 시간은 대개 1주일 정도이지만 이것은 불쏘시개가 충분하고 기후 조건이 좋은 경우이며, 장마철이나 불쏘시개 나무가 충분하지 못한 경우에는 이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숯꾼 이인규]

2004년 1월 5일의 1차 답사 때 이인규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신감리 466-1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8세부터 군입대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숯 일에 종사하였다. 내서 민속 문화 보존회에서 펴낸 『내서 숯꾼 놀이』에서는 1911년부터 이인규의 할아버지인 이영재와 여러 숯꾼들이 광려산 자락에서 숯을 구웠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1923년에는 이인규의 아버지 이정동[당시 17세] 역시 숯 일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인규는 26세에 진주에서 직장 생활을 함으로써 숯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1995년 12월 철도청에서 퇴직한 후 다시 고향인 신감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인규의 선대, 특히 할아버지 대까지 워낙 집안 살림이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히 숯 일에 많은 노력과 연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숯 일 경험 등을 토대로 광려산[일명 절산] 중턱에 직접 숯 굴을 만들어 숯을 구워 팔았다는 사실을 아버지한테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 또한 18세부터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비관하면서도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숯 일을 외면할 수 없어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꿈과 같은 숯 일의 악몽을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고 후손들에게 그 고생스러운 일을 말하기도 싫다.”고 할 정도로 숯 일이 힘든 일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또 “옛날을 더듬어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들을 아버지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큰 숯 굴을 만들 때는 한 달이 넘게 걸렸고, 숯 굴 터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망깨로 땅을 다져야 하며, 아름드리 큰 숯 나무를 베어다가 지게나 목도로 숯 굴 자리로 옮겨야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는 습기가 차서 불이 잘 붙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불미로 숯불을 부쳐야 하고, 큰 숯 굴을 만들어 숯을 구울 때는 보름이 지나야 숯을 끄집어낼 수 있었으니 그럴 때는 깊은 골 우거진 숲 속 숯 굴 근처에 돌담집 움막 속에서 고구마로 연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 나왔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인규는 큰 숯 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숯 나무는 지게로 백 짐 이상이 들어갔는데, 숯 나무 한 짐이 숯이 잘 되어야 겨우 9.4㎏ 나왔을 뿐이니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이었겠느냐고 한다. 당시 마을에서 숯 일을 하던 사람들은 대개 세상을 떠났으나 신목 마을 구연재·임명조·박외도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다만 같이 숯 일을 했고 이웃 신감리에 살고 있는 박치동과는 지금도 종종 만나 예전 숯 일로 고생한 후일담 등을 토로한다.

[숯꾼 박치동]

박치동은 현재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신감리 1154에서 살고 있다. 할아버지 박상용과 아버지 박종한의 직계 장손으로 농사일로 평생을 살아 온 농부이다.

그가 숯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17세 때였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하다고 소문나 있던 그는 당시 숯 일을 하던 신목 마을 이정동[당시 30여 세로 추정]이 심부름을 시킨 것이 인연이 되어 숯 일을 하게 되었다. 나무 베는 일이며 숯 나무를 지게나 목도로 옮기는 일, 숯 굴 만들 때 땅 다지기, 무거운 돌 나르는 일, 산신제 지낼 때 제물 등을 나르는 일 등 힘든 일은 모조리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는 “몇 푼 안 되는 품삯을 받고 숯 일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특히 목청이 좋아서 숯 나무를 할 때나 지게에 짊어지고 숯 굴로 갈 때와 같이 힘이 들 때는 이것을 잊기 위해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특히 ‘어산영’ 소리를 잘 하였는데, 다음은 그가 직접 부른 어산영 전문이다.

어뚜구야 이후후후후

에-----

불같이 더분 날에 태산같은 짐을 지고

베럭방 같은 데로 내려가니

구슬같은 땀방울이 내 눈앞에 쏟아지네

술 배고파 못내려 가것네

술이라고 생기거든 목 마를 때 생기거나

밥이라고 생기거든 배 고플때 생기거나

이니라고 생기거든 이별없이 생기주소

어뚜구야 이후후후--

박치동이 어산영 소리를 하면 광려산 깊은 산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어산영 중 ‘어뚜구야’의 의미는 “산짐승 쫓는 소리 또는 산모퉁이를 돌아간다는 하나의 신호로 사용되었다”고 해석하며, ‘이후후후--’소리는 “너무 힘들고 무거워서 한숨 쉬는 소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때만 해도 많이 불렀던 소리였는데, 지금은 누구한테 이 소리를 배워주겠나 하는 생각도 하고 또 배울 사람도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고 탄식한다. 또 ‘망깨 소리’는 별 문형도 없이 되는 대로 숯 일을 하는 땅 다지기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사는 골짝 이름들을 따서 구성지게 불렀는데, 그 소리마저도 지금은 들을 수가 없고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으며 심지어는 쓸모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사라지고 있는 우리 소리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한다.

한편 숯을 구울 때 숯 나무를 숯 굴에 차곡차곡 쟁여 놓고 숯불을 붙일 시기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습기가 차서 불이 잘 붙지 않는데 그럴 때는 불미로 바람을 넣어 불을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부르는 불미소리도 별 문형 없이 그저 힘든 것을 잊기 위해서 우리 지방에 맞는 소리로 불렀다고 한다.

[의의]

우리 민족은 숯을 연료용과 취사용으로 주로 사용하다가 숯의 특성들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확대 재생산하여 갔다. 예를 들어 무덤이나 건축물 등에 사용함으로써 습기를 제거하였고, 민간에서는 의약 기능까지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숯의 속성을 이용하여 마을 공동체나 집안은 물론 개인에게 다가오는 액을 물리치거나 사악한 것을 제거해 주는 제액과 벽사 기능으로 숯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숯의 일차적인 용도를 응용하여 사용한 예들이다.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나 출산 시 대문에 치는 금줄뿐 아니라 공동 우물을 청소한 뒤 숯을 넣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던 것이다.

숯 일은 고증인들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시되던 일이었기 때문에 작업 과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내서 숯꾼 놀이가 명맥으로나마 전승되고 있어 그 흔적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광려산 자락에 산재하고 있는 숯 굴들은 경남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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