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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38
한자 傳統-變化-仁谷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태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1년 - 장선 인곡 마을 입향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는 전통적 요소를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의 모습을 담아가며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전통적 농촌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인곡 마을이다.

[인곡마을의 형성과 변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는 약 300년 전 진사를 지낸 요산(樂山) 장탁(張鐸)이 마을에 입향한 이후 자손들이 번성한 마을로 추정된다. 인곡 마을에만 인동 장씨가 50여 호 살았으나 이후 차츰 줄어들어 현재는 10여 호 정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이 ‘인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마을 뒤편에 큰 산인 인성산이 있고 그 동쪽의 골짜기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어진 선비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마 인동 장씨의 성씨에 대한 자부심과 그들 집안에 진사나 군수 등 벼슬을 한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을 자긍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은 최근에 급격히 줄어들어 예전에 비하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마을을 형성하는 구성원이 급격하게 바뀌고 원래 마을 주민들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 재화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변화와도 맞물리는 현상이다. 그 변화의 바람이 전통적 인곡 마을에도 불어와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인곡 마을 인동 장씨의 입향조와 그 후손들]

인곡 마을의 입향조는 조선 중기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를 지낸 요산 장탁으로 추정된다. 장탁은 『조선환여승람』 사마(司馬)에 “자(字)는 자진(子振)이요, 호는 이산(尼山)이니 인동인으로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의 손자이다. 현종조의 진사이니, 학행과 문장으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았다. 종형 장선(張銑)이 1691년(숙종 17) 남해에 부임할 때에 진해의 의곡으로 이주하니 자손이 살게 되었고, 추모하여 유허정(遺墟亭)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를 이산정(尼山亭)이라 부른다.

한편 장탁은 사역원 교수(司譯院敎授) 현후(玄㷞)의 장인이며, 1837년(헌종 3) 식년시에 합격하고 공재인(孔在仁)으로 개명하여 자를 성종(聖從)이라고 한 공재욱(孔在郁)의 처 외조부이다. 장탁은 종형인 장선이 1691년에 남해 현령으로 부임할 때 따라 내려와 인곡에 입향하였다. 이외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대개 1690년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인동 장씨 남산파가 세워둔 여경각이 있다. 비각에는 도사 장대익 휼기 포선비(都事張大翼恤飢褒善碑), 안의 군수 장석주 위도 제궁 송덕지비(安義郡守張錫柱衛道濟窮頌德之碑)가 나란히 들어 있다. 안내문에는 “이 비각에는 안의 군수와 경흥 군수를 지낸 정삼품 통정대부 장석주[장대익에서 개명]의 포선비와 공덕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 포선비는 장석주가 관직에 나가기 전인 1885년에 그의 선행을 마을 사람들이 기리어 직접 세운 것이며, 포선비의 내용 중 ‘그 해 갑오년 굶주려 도탄에 빠진 자 몇이던가 소금을 사서 쌀로 바꾸어 궁하고 가난한 자 보살피고 먹였네, 온 마을의 산부처요 추운 고을의 따뜻한 봄빛이네-을유년 사월 읍 사람들이 세움’이라 새겨 있고, 송덕비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그의 치적을 기리어 1912년 비각 건립과 함께 세워진 것이다. 원래 이 비각은 인곡리 964에 위치하였으나 2007년 현동에서 임곡 간 국도 확장 공사로 인해 현 위치인 인곡리 525로 이전 신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장탁의 후손인 장대익은 군수를 지냈으며 마을에 공덕을 쌓은 사람이다. 이 외에 마을에서 뚜렷하게 이름이 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인곡 마을 지명과 전설·민속]

인곡이라는 지명은 마을 북쪽의 가장 큰 종산인 인성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지명이 어진 선비가 많이 나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즉 마을이 의림사도 있고 인성산도 있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는 훌륭한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때문일 것이다.

창원 지역 인근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의 『창원 도호부 권역 지명 연구』에 따르면, ‘인곡’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석한다. 인곡과 같은 마을인 정곡(正谷)이 바랑골·바른골·직곡(直谷)으로 불리는 것은 서쪽을 지칭하는 우리말  의 변형인 바랑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인곡이 의곡(義谷)이라고 불린 것을 토대로 의(義)의 옛 훈이 ‘바른’이기 때문에 의(義)가 인(仁)으로 바뀌어 표기될 때도 역시 같은 의미로 불렸을 것이라고 한다. 인(仁)의 옛 훈이 종자를 뜻하는 우리말 ‘씨’가 있는데 이것의 고어인 ‘’가 그 원래의 음이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국어 학자인 이병선 교수는 이 ‘’를  의 변이 형태로 보았고 이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인(仁)’으로 표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둘 다 나름대로의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 즉 ‘인성(仁聖)’이라는 산 이름이 어진 성인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인곡(仁谷)’이라는 마을이 어진 선비가 많이 나는 곳으로 해석한 것도 문화 인류학적 의미에서는 합당한 해석이다. 그리고 지명 형성의 틀을 기반으로 이곳이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해석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인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산봉우리인 옥녀봉을 매우 의미 있게게 생각한다. 한자어 그대로 옥녀(玉女)를 해석하여 이곳의 기운을 앞에 있는 옥녀봉이 감싸고 있으므로 마을에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오래 산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그나마 마을 뒤쪽에 있는 사자 등이 남성의 힘을 강하게 가지므로 남자들이 단명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옥녀봉은 ‘옥계’라는 마을 지명과 연관된다. ‘옥계(玉溪)’나 ‘옥녀(玉女)’의 옥은 지명 형성의 틀을 기준으로 보면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형성된 지명이다. 옥(玉)의 훈이 ‘곳’이고 이것이 골로도 읽힌다. 골은 남쪽을 뜻하는 우리말  의 변형으로 지명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옥녀봉은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인곡 마을에서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평암리 부재로 넘어가는 고개를 부재 고개라고 한다. 고개 이름을 붙일 때 이곳에서 넘어가는 상대편의 마을 이름을 고개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부재’라는 말이 불당·사찰 등을 의미하는 불(佛)과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 재가 결합한 경우라면 그곳에는 옛 절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 관계는 불분명하다.

[인곡 마을의 전통적 요소와 변화]

인곡 마을에는 인동 장씨 집성촌으로 50여 호가 모여 살았다. 입향조 장탁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요산재(樂山齋)를 지었다. 재실 내에는 요산재 상량문(樂山齋上樑文), 요산재 원운(樂山齋原韻), 차운시(次韻詩) 등이 있다. 인곡 마을에 인동 장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약 300년 전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오랜 소나무가 그것을 증거한다. 인곡의 인동 장씨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양반으로서 그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다.

인곡과 정곡을 잇는 길을 따라가면 이 두 마을 한가운데로 뻔은 능선이 있는데 그 능선 끝부분에 이 당산나무가 있다. 나무의 둘레는 거의 3미터가 될 정도이며 그 아래는 당산제를 지내던 제단과 축대가 있다. 마을에 당산제를 지내지 않은 것은 벌써 한참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마을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지내어지다가 마을이 변하면서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이 되던 당산제도 지내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개인이나 무당 등이 개인의 발복을 위하거나 신기(神氣)를 채우기 위하여 가끔씩 제를 올린다고 한다. 당산제가 사라지는 것은 현대의 경제적 가치가 전통적 가치를 넘어서게 된 이후일 것이다. 마을에 전통적 농경 문화가 거의 사라지고 새로운 농법인 시설 재배가 들어온 것과 당산제를 안 지내게 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 농경의 가치가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던 것이 재화가치로 변하면서 공동체가 해체되고 당산제도 해체된 것이다.

현재는 전통적 작물의 경작을 하여 수확하는 논농사나 밭농사는 거의 노인들 몇 사람만 담당할 뿐이다. 많은 부분은 외지인이나 몇몇 젊은 사람들이 화훼단지로 국화 농사를 지어 수익을 창출한다. 마을의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이제 전원주택을 지을 수 있는 땅으로 지목이 변경되었고 이로 인하여 부동산 업자들이 이곳을 전원주택 지구로 소개하면서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하여 마을 주민들도 이제는 거의 외지인이고 원래 이곳에 살던 인동 장씨는 10여 호도 되지 않는다. 마을의 집들은 외지인들에게 팔려 전원주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또한 논으로 남아있던 마을 뒤의 농경지는 모두 용도 변경이 되어 외지인들의 전원주택이 10여 채 이상 들어섰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마을의 상포계나 당산제, 마을 공동의 행사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마을 안쪽 골짜기에 있는 전통 사찰인 의림사도 마을 사람들의 안식처였던 것이 이제는 규모가 커지면서 외지인들의 관광지로 변해버렸다. 노인 요양 병원도 두 군데나 새롭게 건설되고 공장이 들어서고 하우스 단지가 눈앞을 가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마을 안까지 공장이나 외부의 큰 건물들이 많이 침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원주택을 지어서 들어오는 외지인들과 원래 마을 주민들이 서로 적절한 친근감으로 결합되는 풍토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노령화되었던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을 노인들이 반기는 마음이 앞섰던 모양이다.

[전통 마을의 지속과 변화에 따른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인곡 마을에는 현재 많은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다. 의림사를 오가던 사람들이나 주변의 병원을 오가던 사람들이 이곳을 아름다운 전원 마을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의 전원주택을 지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주말에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마을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면서 상호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 마을의 모습이 개변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하듯 받아들였다가 짧은 시간을 지탱한 뒤 금세 사라지는 것보다는 조금씩 변화해 가는 물결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현재의 변화처럼 도시적 요소들이 마을에 조금씩 어울리고 그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공동체로 형성되는 것이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길일 것이다. 현재의 이러한 새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자면 원래 이 마을이 가지고 있던 전통성을 함께 계승하고 함께 그것을 지켜간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함께 계를 만들어 화합하고, 마을의 당산제를 같이 지내고, 마을 공동의 일을 동회를 통해서 결정하는 등의 일들을 통하여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꿈꾼다면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이곳에 새로운 농촌의 미래가 담겨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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