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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애환 담은 만날재 전설은 신화가 되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42
한자 女人-哀患-傳說-神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태성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전해지는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삶의 애환을 담은 ‘만날재’ 고개에 관한 전설.

[만날재의 위치와 설화의 공통성]

각 지역마다 거의 대부분 존재하는 ‘만날재’에는 동일한 설화가 있다.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는 만날재라는 이름을 가진 고개와 그 고개에서 벌어진 옛 축제가 존재한다. 마산의 진동과 내서, 월영동 일대를 연결하는 만날재, 창원의 안민과 진해 이동 지역을 연결하는 현재의 안민 고개 부근의 만날재, 창원의 적현과 진해의 속천을 연결하는 만날재, 마산 중리 지역과 칠원 지역을 연결하는 만날재 등 어떤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을 어어 주는 고개에 공통적으로 만날재가 존재한다. 이 외에도 남산 상봉제, 마산 석전동 봉화산의 상봉제 등도 유사한 성격을 가지며 모두 8월 보름이 지난 음력 8월17일에 만날재 형식의 축제인 만날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만날재 설화에는 일정한 공통성을 가진다. 즉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추석이 지난 뒤 서로 보고 싶어서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만나서 서로 부등켜 안고 울었다는 내용이다.

[만날재 설화의 내용]

어떤 한 지역에 살던 가난한 집의 딸이 집안 형편 때문에 다른 지역의 부유한 집의 바보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시집간 지 몇 년 만에 이 딸이 친정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바보 남편을 동반하고 두 지역 사이에 있는 고개를 넘어서 친정에 간다. 바보 남편은 고갯마루에서 기다리고, 딸은 친정에 가서 반가운 해후를 하다가 늦게 된다. 바보 남편은 부인이 자신을 버린 줄 알고 돌에 머리를 박고 죽는다. 늦게 돌아온 부인은 그것을 보고 울다가 시댁으로 돌아가지만 엄청난 구박을 받는다. 몇 년이 지난 뒤 며느리는 친정이 그리워 아무 생각 없이 고개에 올라 친정을 바라보기만 하려고 올라간다. 그때 마침 친정어머니도 딸이 그리워 고개에 올라 우연히 서로 만난다. 이 둘이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기념하여 해마다 추석 2일 뒤[음력 8월 17일]에 그 고개에 모여서 만남을 한다.

[2월 영등제와 8월 만날재 설화의 상관성과 생성적 의미]

이러한 설화는 지역마다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만날재는 대부분 모두 8월17일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설화가 특수한 지역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 보편성은 곧 만날재가 특정한 지역의 의례가 아니라 보편적인 의례라는 것이다. 농사가 시작되는 때인 음력 2월 초하루는 바람신인 영등 할미가 딸[혹은 며느리]을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며칠이 지나면 딸을 지상에 두고 하늘로 올라간다. 딸은 지상에 내려온 채 농사신으로 대지에 내재된 채 농사가 끝날 때까지 머무른다. 그러나 농사가 끝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그 때가 바로 농사가 끝나는 8월 추석 다음이다. 즉 농사신으로 대지에 내재되었던 딸이 바람신이며 농사신인 영등신[어머니]을 만나러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이 만날재의 설화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화소들의 몇 가지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친정어머니와 딸의 만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둘째 왜 지역마다 동일한 축제가 벌어졌을까. 셋째 만날재와 만날제의 원래적 의미는 무엇일까.

[친정어머니와 시집간 딸의 만남의 의미-그 신화적 양상]

우리 민속에서 친정어머니와 딸이 연관되는 절기는 두 번이 있다. 첫 번째는 이월초하루 바람 올리는 날, 즉 영등제이고 두 번째는 만날제이다. 영등제는 바람신이자 농사신인 영등 할망이 딸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2월 초하루에 지상에 내려왔다가 20일 후 혹은 3월 15일 혹은 3월 20일에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때 딸은 데리고 오면 그 해 비바람이 순조로워서 농사가 잘되고 해난 사고가 없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흉년이 들고 풍해(風害)를 입는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영등 할망 혹은 영등 할매, 영동 할매는 바람신이자 농사신이며 바다에서는 풍어신이다. 이러한 신은 신화적 체계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신화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신의 체계는 삼위신(三位神)이다. 불교의 본신불[노사나불)·법신불[비로자나불]·화신불[석가모니불], 그리스 신화의 우라누스·가이아·제우스, 기독교의 성부·성령·성자의 체계가 이러한 것이다. 이러한 삼위신은 삼위가 일체이며 그 일체를 나타내는 말 중 삼신 할매가 있다. 또 무속에서 모든 무당의 최고신인 제석(帝釋)은 바리대기 공주의 세 아들이다. 이 삼위신이 우리 신화에 나타난 형식을 보면 환웅·웅녀·단군, 해모수·유화·주몽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천상에서 내려온 신은 반드시 지상에 존재하는 여성과 결합하고 반드시 새로운 국가, 혹은 새로운 질서를 열어갈 아들을 낳는다. 이때 천상에 있는 신은 모두 남성으로 설정이 된다. 또 새로운 신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는 신은 여성으로 설정된다. 하늘, 즉 남성으로 설정된 자는 지상에서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혹은 일정 기간 머물면서 여성과의 결합 후 하늘로 되돌아가 버린다. 이후 여성은 새로운 질서를 열어갈 존재를 낳고 더 이상 큰 의미 없이 사라진다. 여기서 대개 하늘은 남성을, 땅은 여성을, 이 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것은 하늘과 땅의 질서를 꿰뚫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 혹은 인간이다.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는 자연에 대한 상징이다. 남성으로 상징화된 하늘은 해와 비와 바람 등 자연의 질서이다. 여성으로 상징화된 땅은 대지로 하늘의 질서가 땅으로 스며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지모신, 즉 대지의 여신이다. 하늘에 질서가 땅에 골고루 펼쳐져 땅에서 생산된 결과물은 꽃과 곡식과 과일 등과 같은 하늘과 땅의 정화이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면 영등 할매의 실체는 바로 규정된다.

영등 할매라는 신을 할매라는 말 때문에 여성으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할매라는 말은 신(神)을 지칭하는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최고의 신을 하늘님·하느님·하나님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말 하늘과 님이 결합한 것이다. 하늘은 고어가 +이다. (한)은 크다 혹은 많다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하도 많아서, 한-거석, 한-보따리, 한-아름은 ‘하나’라는 단일 개념이 아니라 다수 혹은 많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전(大田)을 한밭으로, 큰 고개[大峴]를 한실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말이다. 은 알다[智, 知]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난생 신화에서 로 태어났다는 기록들은 대개 깨달은 자, 즉 아는 자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어떤 시대와 그 시대의 질서를 가장 잘 아는 자[깨달은 자]는 그 시대의 가장 탁월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두머리[首露]가 되고 밝게 깨친 왕[赫+居世]이 되는 것이다. ‘알지(閼智)’의 알과 지는 같은 말이다. 을 지혜 즉 알다로 읽으라는 의미 첨가어이다. 그러므로  은 많이 깨달은 자, 크게 아는 자라는 의미이다. 전지(全知)하다는 의미로 전지하기 때문에 전능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을 이라고 하였고, 이 분리되면서 로 다시 하늘로 변형된 것이다. 한편 이 결합되면서 로 되고 에 사람을 지칭하는 접미사 이·미가 붙으면서 미가 되고 다시 이것이 할매로 변형된 것이다. 우리의 민속에서 산신당에 산신을 그릴 때 할아버지와 호랑이의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산신의 이름은 모두 할매이다. 지리산신을 천왕 할매, 노고 할매 등으로 부르는 것이 한 예이다. 그러므로 영등 할매는 영등신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우리 신화에서 바람신은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같이 하강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의 결합형으로 환웅과 동질적 신이다. 즉 태양신이며 남성신이다. 이러한 남성신이 여성신과 연관되게 된 것은 태양신의 한 모습인 바람신이 대지의 풍요에 직접 관여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바람신인 영등신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딸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온다는 것은 대지와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람신이 대지와 잘 결합할 경우 풍요가 들고 대지와의 결합이 순조롭지 못하면 흉년이 드는 것을 친정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비유적 관계로 이야기한 것이다. 영등제에 관한 이야기에서 바람신이 올라갈 때 딸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간다는 말이 없다. 이는 하늘의 질서가 대지에 결합하면서 대지 속에 이미 하늘에 질서가 내재된 뒤 하늘은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고 대지 속에는 하늘의 질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영등 할미가 내려오면서 데려왔다는 딸 혹은 며느리는 이미 대지 속에는 내재하여 대지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상정되는 바람신 혹은 태양신은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예 동명왕 신화]. 이러한 영등신을 맞이하는 바람신 맞이굿은 하늘의 질서를 잘 받아들여야 하는 일년의 시작점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즉 농사나 어로의 시작점에 풍년제나 풍어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친정어머니와 딸이 등장하는 민속이 만날제이다. 영등제가 농사의 시작점에서 이루어진 민속이라면 만날제는 농사가 끝나는 시점에 이루어지는 민속이다.

만날제에 설화에서 나타나는 친정어머니와 딸의 만남이라는 공통적 화소는 어떤 의미일까. 추석이 지난 이틀 뒤 그것도 지역과 지역을 가르는 고개가 있는 곳마다 친정어머니와 딸이 우연히 만나는 사건이 동일하게 발생되었다는 설화와 또 간혹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곳을 축제의 장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러한 일들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될 때 가능한 일이다. 즉 친정어머니와 딸의 만남 그리고 상봉제[만날제]가 특정 지역에 제한된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의미로 인식되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위에서 농사의 시작 시점인 2월 초하루에 영등 할매로 지칭되는 영등신이 친정어머니로 설정되고, 그의 딸은 영등신[태양신]의 질서를 내재한 채 대지로서 지상에 남겨진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때 바람신을 친정어머니로, 대지에 내재한 그의 질서를 딸로 상정하면서 친정어머니와 딸이 이별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구성되게 되었다. 대지에 내재된 질서로 상정된 딸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뒤에 대지에 내재되었던 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신화에서 지모신[대지]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존재[신, 왕]를 탄생시킨 뒤 원래의 대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미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대지는 그 대지에 다시 새로운 신의 질서가 내려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대지가 되지 못하면 기존의 대지는 불모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왔던 원래의 질서, 즉 친정어머니[하늘의 질서]를 동반하고 내려왔던 딸을 생명을 탄생시킨 뒤 그 질서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대지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봄에 하늘에서 질서가 대지에 내려 대지에 내재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친정어머니가 딸을 대지에 내재시키고 가버렸다면 가을에는 대지에 내재되었던 질서[딸]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에 내재되었던 질서로 표현된 딸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친정으로 귀환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친정어머니와 딸의 만남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만날재’라는 고개 혹은 ‘남산’과 같은 산에서 친정어머니와 딸이 만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은 그곳이 바로 그곳 지역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심산이며 제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농사 시작기의 영등제와 농사 수확기의 만날제]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을 맞이하기 위해 봄에 영등신 맞이굿을 하였다면 가을에는 대지에 내재되었던 신을 돌려보내는 굿을 한 것이 만날제이다. 만날제가 봄에 내려왔던 신을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는 제의라면 그 제의가 일어나는 곳은 당연히 대지와 하늘이 접하는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지점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목 혹은 우주산 혹은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봉제[만날제]는 농사신에게 일 년 동안 농사의 풍년을 감사드리고 농사신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다음해에 올해만큼의 풍년이나 더 나은 수확을 기원하는 제의인 것이다. 즉 전형적인 추수 감사제의 형식이다.

추수 감사제의 형식 중 곡식의 대를 불 피워서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이 있다. 봄의 경우 보리타작이 끝난 뒤 가을에는 나락 타작이 끝난 뒤 탈곡을 하고난 뒤 남은 보릿대나 볏짚 찌꺼기, 즉 뿍대기[검불]를 태우는 것을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행한다. 이 때 사람들은 볏짚이나 보릿대 속의 벌레를 죽여서 다음 농사에 벌레가 해를 끼치지 않아 다음해의 수확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방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의례에서 보릿대와 볏짚을 태울 때 알곡이 상당부분 들어있는 뿍대기를 태우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타작이 대략 끝나고 나면 완전히 알곡이 분리된 것은 바로 거두어서 갈무리하면 되지만 뿍대기 속에는 상당한 알곡이 있지만 그것을 바로 분리시키지 못하고 모아 두었다가 큰일이 끝난 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수확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알곡이 상당히 들어있는 뿍대기의 일부를 불에 태우는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곡식을 태우는 행위이며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매우 심각한 행위이다. 그런데도 왜 그러한 행위를 했을까. 우리 조상들은 곡식 알갱이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성주 단지나 조상 단지에 곡식을 넣고 조상신으로 섬기는 것을 보면 이러한 곡물 조령신 숭배 사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농사가 끝나고 뿍대기를 태우는 것도 동일한 의미이다. 곡식의 알갱이는 위에서 보았듯이 하늘의 질서가 대지에 잘 실현되어서 그 정화로 탄생된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본다면 하늘=질서가 내재된 대지=곡식 알갱이의 공식이 성립된다. 즉 제단에 꽃이나 곡물·나물 등을 바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의미이며, 그 제물을 사람들이 음복하면 신과 동질적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곡물의 알갱이를 태워서 그 속에 내재되었던 신의 질서를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이 들판에서 곡식이 든 뿍대기에 불을 피워 연기를 하늘로 올리는 행위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원래 의미는 시간에 따라 변모하여 현재는 조선 시대 시집간 딸이 겪는 삶의 애환과 시집보낸 딸을 그리워하는 친정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다. 원래 농사 시필기(始畢期)에 이루어지던 농사신을 맞이하던 의례와 농사신을 돌려보내는 의례가 퇴화되면서 조선 시대 여인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설화로 치환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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