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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카프(KAPF) 문학의 거두! 권환의 문학 행보와 창원 살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44
한자 韓國-文學-巨頭-權煥-文學行步-昌原-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정호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출신의 문학인.

[개설]

경상남도 창원시는 권환(權煥)[1903~1954]의 고향이다. 1924년 문단에 나온 뒤 30여 년 동안 계급 문학의 중심에서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을 실천했던 문학인이다. 그는 시·소설·아동 문학·평론·희곡에 걸쳐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펼쳤으며, 시집 『카프 시인집』[공동 시집]·『자화상』·『윤리』·『동결』을 펴냈다. 8·15 해방 후에는 조선 문학가 동맹 제2대 서기장으로서 다시 열정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고향 창원에 머물며 오랜 병마와 싸우다가 1954년 7월 30일 완월동에서 사망했다.

[권환의 삶과 문학]

권환은 근대 문학사는 물론 지역 문학사에서조차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래도록 월북 문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잘못 알려져 왔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88년 해금 조치 뒤에 비로소 그는 월북 문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창원의 지역 문학을 보더라도 노산 이은상과 달리 문학 생애 내내 역사의 응달로만 떠돌았다. 하지만 지난 2004년 5월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한 ‘권환 문학제’가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일대에서 개최됨으로써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문학적 업적이 우리의 근대 문학사는 물론 창원의 지역 문학사에 되살아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제1회 권환 문학제 때 그의 유택에 세운 표지석 명문은 다음과 같다.

“보광산 자락 이 곳에는 한국 계급 문학의 중심에서 겨레 사랑을 올곧게 실천한 시인 권환[본명 권경완]이 조성남 여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시인은 1903년 내려다보이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마을 경행 학교에서 배운 뒤 1919년 서울로 올라가 중동 학교·휘문 고보를 마쳤다. 1924년 일본 산형 고교를 거쳐 1926년 경도 제국 대학 독문과에 입학하였다.

시인은 1924년 『조선 문단』 12월호에 단편 소설 「아즈매의 사(死)」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신소년』·『별나라』·『조선 지광』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시·소설·아동문학·평론·희곡에 걸쳐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펼쳤다. 일찌감치 겨레 문학의 방향에 대해 고심했던 시인은 경도 제대를 졸업한 1929년부터 카프 동경 지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중외 일보 기자로 몸을 담고, 카프 중앙 위원 기술부 책임을 맡아 계급 문학의 2차 방향 전환을 앞에서 이끌었다. 소장파의 핵심 맹원으로서 창작과 이론, 조직 활동에서 열성을 다했다. 시인은 1934년 신건설사 사건으로 말미암은 카프 2차 검거 때 왜노에게 붙잡혀 고초를 겼었다. 1935년 카프 해체 뒤 지병인 결핵 탓으로 옥에서 나와 요양 생활에 들어섰다.

시인은 을유 광복을 맞이하여 조선 문학가 동맹 제2대 서기장으로서 다시 열정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병고가 더욱 깊어져 1948년부터 고향 마산에 머물며 오랜 병마와 싸웠다. 온 나라가 비에 젖은 1954년 7월 30일 시인은 완월동에서 가난과 병마에 꺾이고 말았다. 낸 시집으로 『카프 시인집』[1931]·『자화상』[1943]·『윤리(倫理)』[1944]·『동결(凍結)』[1946]이 있다.

나라 잃은 시대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겨레 문학의 불꽃을 피워내고 스스로 그 불꽃으로 깨끗하게 돌아간 사람이 권환이다. 시인을 기리는 제1회 권환 문학제를 맞이하여 삼가 이 자리에 유택 표지석을 세운다.”

나라 잃은 시기부터 권환은 우리 계급 문학의 극좌파 노선인 볼셰비키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시·소설·평론·희곡의 여러 갈래를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대를 앞뒤로 해서 프로 예술 동맹에서 중앙 집행 위원을 지내면서, 임화·안막·김남천과 더불어 계급주의 문학 운동의 선봉에 서서 좌파 문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1935년 카프 해산 뒤부터 그 열정은 사그라들면서 절박한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겪게 된다. 그 무렵 나온 시집 『자화상』과 『윤리』는 그 같은 시적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광복을 맞이하자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임화·김남천·이원조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 문학 건설 본부를 결성한다. 그 뒤 1945년 9월 17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은 조선 문학 건설 본부의 인민적 신문화 건설론에 반대하면서 카프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결성되었다. 여기에 권환은 이기영과 한설야를 앞세우고, 윤기정·한효·한설야·이동규·윤규섭·송영·홍구로 대표되는 이념적 강경파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때부터 권환은 여러 매체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그 뒤 1945년 9월 30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은 연극·음악·미술 단체들을 규합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으로 바뀌었다. 권환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의 시부 위원, 외국 문학부 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1945년 12월 3일 권환과 홍구의 협력으로 조선 문학 건설 본부와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의 합동 위원회를 연 뒤, 두 조직의 통합을 결의하고 1945년 12월 13일 전국 문학자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통합과 준비 과정에서 권환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새로운 조직의 강화를 목표로 1946년 2월8일부터 9일까지 제1차 전국 문학자 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그는 개회 선언을 했고, ‘농민 문학의 방향’이라는 보고 연설을 했다.

이 대회의 조직 위원으로는 김태준·권환·이원조·한효·박세영·이태준·임화·김남천·안회남·김기림·김영건·박찬모가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이 대회에서 전국 문학가 동맹의 제2대 서기장을 맡으며 새 나라 건설을 위한 열정을 불태웠다. 이를 통해 조선 문학가 동맹은 전국적으로 120여 명의 맹원을 확보했고, 그 조직의 명칭도 조선 문학가 동맹으로 확정했던 것이다. 이때 권환은 중앙 집행 위원회 위원, 시부 위원, 평론부 위원, 농민 문학부 위원장에 이름이 올랐다.

[권환의 고뇌와 문학 행보]

권환은 계급주의 문학의 선봉에 자리했던 이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료들과 달리 북행을 선택하지 않았다. 뒷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가 월북하지 않은 까닭에 대해 연구자들은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단지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말미암았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 머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여러 문제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이데올로기의 좌절과 자기반성을 들 수 있다. 1935년 카프 해산과 전향 서약서 제출에서 오는 좌절감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념 굴절의 폭과 깊이가 유달리 컸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카프 해산과 함께 그의 삶과 문학 세계의 변모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나라 잃은 시기 왜노 군국주의의 외압에서 말미암아 전향함으로써 그의 의지는 크게 꺾여버렸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광복을 맞이한 상황에서는 크게 달라진다. 그 무렵 서기장의 직책을 맡은 그로서는 한때 계급주의 이데올로기로 재무장하게 된다. 하지만 미 군정의 압박으로 또 다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다른 동지들이 월북한 마당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 또는 동지들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당연히 월북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가 월북하지 않은 까닭은 그 같은 명분보다도 의식 변화와 자기비판에 말미암은 바 크다고 하겠다.

둘째, 신병인 폐결핵의 악화를 들 수 있다. 이는 대개의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1930년대 초반부터 앓기 시작했던 폐결핵 증세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에서 나온 까닭이다. 물론 유족의 말에 따르면, 한때 서울 대학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광복 이후 마산 결핵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전쟁기에는 그의 병세가 매우 심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병세의 악화라는 이유로 북행을 쉽게 단념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셋째, 고향 사랑과 장남 콤플렉스를 들 수 있다. 이념의 좌절과 건강의 악화에 심신의 악조건 속에서 ‘고향’과 ‘가족’은 그에게 실존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한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이었던 그에게 월북 선택은 섣불리 감행할 수 없는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다분히 심리적인 접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에 배여 있는 고향에 대한 미련, 자신으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 대한 책임감,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까닭에 권환은 북행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의 해적이에 따르면, 8·15 해방기부터 전쟁기까지 두세 차례 월북의 기로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데도 그는 월북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권환의 월북 문제는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월북에 무게를 둘 입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권환의 귀향과 창원 살이]

좌익 활동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7년 11월 20일 카프의 동지였던 임화김남천이 월북했다. 하지만 권환은 끝내 북행길을 택하지 않았다. 광복기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권환은 북행길을 단념한 채 고향 마산으로 몸을 숨겼다. 그로 말미암아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남쪽의 어느 문인 행적란에서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 문단에서는 월북 문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한 연구자의 조사 결과 그는 뜻밖에도 월북하지 않고 마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문학사에서 권환임화와 더불어 계급 문학의 볼세비키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카프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권환은 나라 잃은 시대부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에 기입하여 무산 예술과 농민 문학 등 계급주의 문학의 중심부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시적 변모는 내부보다는 외압적 시대 상황에 기인했다고 하더라도 안팎 사정으로 볼 때 그는 처음부터 월북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념적으로 변해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가족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환이 북행길을 단념하고 귀향한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창원시 완월동에 삶터를 마련하여 칩거한 때는 1948년 8월 무렵으로 보인다. 지금껏 조사된 바에 따르면 그는 창원에 숨어들기 전부터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창원에 머물 때에도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고 주장하는 글도 있었다.

“나는 요양 생활에 들어간 후부터 인생의 낙이란 전연 모르고 지내왔다. 부귀·공명·강령 등 모든 낙이 나에겐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그와 반대인 병·빈(貧)·고독·우배(憂盃)·고통이 있을 뿐이다. 청춘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행복과 쾌락은 더구나 있을 수 없다. 한 잔 술, 한 모금 담배의 일시적 낙은 원래부터 나에게 없다. 근 10년간 찰나 동안이라도 낙과 기쁨은 느껴본 적이 없으며 단 한 번이라도 간담(肝膽) 속에 우러나온 유쾌한 웃음을 웃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도 담담한 특수적 낙이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때이다. 낮이나 밤이나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그 동안에는 모든 우수와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사볼 수 있는 가정 형편도 아니다. 돌아다닐 건강도 아니다.”

이 글은 창원시 완월동 우거에서 유명을 달리한 권환이 1954년에 남긴 마지막 수필이다. 그의 표현처럼 “요양 생활에 들어간 후부터 인생의 낙이란 전연 모르고 지내왔고… 병·빈(貧)·고독·우배(憂盃)·고통이 있을 뿐”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에게 ‘특수적 낙’이 있었는데, 그것은 ‘낮이나 밤이나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글에는 그가 만년에 겪었을 창원 살이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듯 그의 귀향 뒤 창원에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고향 친척의 말에 의하면, 그는 창원에 내려오자마자 가포에 있는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1년 남짓 입원 생활을 했다. 그런 다음 창원 대동 병원과 봉성각 의원[당시 창원시 구암동 소재]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전한다. 또한 그 무렵 권환은 후두 결핵으로 말을 잘 못하고 글을 써서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치료비를 보태기 위해 마산 극장에서 문예봉임화의 시를 낭송하였고,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그런 만큼 개인적으로는 열악한 생활 환경으로 폐결핵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몸도 마음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까닭에 밖으로 드러나는 문학 활동은 엄두에 두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전쟁 때에는 진주의 친구 집에 잠시 은신하고 있다가, 창원시 완월동에서 기거했다고 전한다. 그 무렵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권환의 아내는 남편의 간호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권오엽의 회고에 따르면, 권환의 아내는 ‘함지박에 잡화를 이고 버스 정류장에서 행상까지 하면서 남편의 약값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남편이 각혈을 해서 위독하면 들쳐 업고 가파른 완월동 내리막길을 걸어서 병원을 향해 오르내리며 병간호를 했다’고 한다.

사실 권환의 귀향과 창원 살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창원 살이는 너무나 궁핍했던 까닭에 그의 아내는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고, 보다 못해 나선 지역 문우들의 도움으로 1952년 무렵 마산 공립 중학교[현 마산 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적빈한 생활과 폐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던 처지를 생각하여 집안의 형님뻘인 권영운이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권영운은 당시 마산 여자 중학교[현 마산 여자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권환은 임시 강사로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독일어를 1년 남짓 가르쳤다고 한다.

사실 권환은 북행길이 아닌 귀향길을 선택하고, 6년 남짓 고향 창원에서 머물렀다. 물론 그의 창원 살이는 열악한 생활 속에서 병마와 싸워야 하는 고통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과 가족이 곁에 있었기에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고, 마음만은 편안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렇게 그는 불우한 시대 속에서 마산 결핵 요양소를 오가며 투병 생활을 하다가 폐결핵의 병세가 깊어져서 1954년 7월 30일 창원시 완월동 101-14번지에서 삶을 마쳤다.

[창원이 자랑하는 권환 문학]

권환은 평론과 아동문학 그리고 시에서 경남·부산 지역 근대 문학의 첫 마당에 놓이는 문인이다. 그런 만큼 우리나라 현실주의 문학사에서 뛰어난 이론가며 올곧은 문학실천가였다. 그는 나라 잃은 시기 3년 동안 왜노 군국주의 지배 속에서 험난한 문학 살이를 겪었고, 광복 와중에서도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빚어낸 난감한 풍랑을 겪었으며, 6·25 전쟁기 가난과 폐결핵이라는 시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우리 근대 문학사의 불우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결국 권환의 삶과 문학에 있어 마지막 합치점은 고향이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그곳은 바로 창원시 진동면오서리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향 시편들에 접근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고향 심상, 장소감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역 문단의 시선은 그리 달갑지 못한 듯하다. 지역을 넘어 우리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권환의 문학을 제대로 자리매김되고 심도 있게 값 매겨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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