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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12
한자 安骨浦海戰
이칭/별칭 한산대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592년 7월 8일 - 한산도 해전 발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10일연표보기 - 안골포 해전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11일연표보기 - 해전 결과 추가 확인
발생|시작 장소 안골포 - 진해구 안골리 지도보기

[정의]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음력 7월 10일 창원[진해구] 안골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

[개설]

한산도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1592년 7월 10일[음] 조선 수군 함대가 안골포에 있던 일본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끈 정예 수군 함대 42척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으로 한산대첩의 한 축을 이루었다.

[역사적 배경]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는 제2차 출동에서 72척의 적선을 분멸시키고 진을 파한 채 각자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세력이 계속 경상도 지역에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각도의 수군은 서로 공문을 돌려 약속하며 배들을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를 자세히 탐문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가덕, 거제 등지에서 10여 척 혹은 30여 척의 배가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었고, 전라도 금산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고 있었다. 따라서 전라좌·우도 수군은 7월 4일 저녁 때 모여 7월 6일에 일제히 발선하였다. 도중에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서 경상우도의 전선 7척도 합류한 후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러 밤을 보냈다.

7월 7일에 동풍이 크게 불어서 행선하기 어려웠는데,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피란하여 산에 올랐던 미륵도의 목자 김천손이 달려와 적선 70여 척이 하오 2시경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통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7월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행선하였다.

이 일본 함대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거느린 일본의 정예 수군으로 모두 73척이었다. 와키사카는 7월 6일 김해를 떠나 이날 견내량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 수군은 작전 계획에 따라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이끄는 판옥선 5, 6척을 시켜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유인하여 유인 함대가 넓은 바다에 이르러 본대와 합류했을 때 학익진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였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전선은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 전선 73척 중 47척을 분멸시켰고, 12척을 온전하게 나포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도망간 14척의 적선을 추격하려고 했지만 종일 접전으로 장졸들이 노곤하였고, 날도 어두워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앞바다에 결진하고 밤을 지냈다.

7월 9일에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대어 있다’는 탐망군의 보고에 따라 이순신은 즉시 전라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책을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날은 날이 이미 저물고 역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거제 땅 온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경과]

조선 수군 함대는 한산도 해전 때와 마찬가지로 7월 9일 저녁에 제장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가진 후 7월 10일 새벽에 발선하였다. 전라우수사는 안골포 바깥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결진해 있다가,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접전을 시작하게 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도록 사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벌여 먼저 전진하고 경상우수사는 이순신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조선 수군 함대가 안골포에 이르렀을 때 선창에는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에 3층으로 뚜껑 있는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부박하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고기비늘처럼 잇대어 있었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군 장수는 와키사카와 함께 부산에 내려왔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였고, 이들 또한 도요토미 직속의 정예 수군이었다. 이들은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 와키사카를 뒤쫓아 7월 7일 김해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이곳 안골포로 옮겨 와서 정박 중이었다.

그런데 안골포의 전투 환경은 조선 수군의 학익진 형성에 적합하지 않았다. 즉 이순신은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대선은 용이하게 출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여러 번 유인 작전을 펼쳤지만 한산도 해상에서 선운선(先運船) 59척이 참패를 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일본 수군은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안골포의 포구가 좁은 점을 고려하여 일종의 장사진(長蛇陣)을 구성하여 공격하였다. 그리고 약속대로 전라우수군까지 합세하여 병력 집중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또한 대장선인 대선을 위주로 선제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에 일본 수군은 당하지 못한 채 다수가 육지로 도주하였다. 그런데 당시 안골포 산 속에는 많은 백성들이 잠복해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의 전선들을 모조리 없앨 경우 궁지에 빠진 일본 수군들에 의해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따라서 남은 전선을 둔 채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일본 수군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을 때 일망타진할 계획인 것이다.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일본군들이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전투 현장에서는 일본군이 전사한 왜적들을 열두 곳에 모아 쌓고 불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본 함대는 항해가 가능한 군선으로 야간을 이용해 안골포를 탈출, 부산 쪽으로 도주하였다. 조선 수군은 가덕 바깥으로부터 동래·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조선 수군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런 후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인 것처럼 일본군이 생각하도록 제반 조치를 취한 후 밤을 틈타 철군하여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결과]

이 날의 전투 결과는 다른 해전에 비해 명확하지 않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42척 중 거의 다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 측의 연구에 의하면 이날 구키와 가토의 함대는 20척의 군선을 잃었다고 한다. 종합하면 일본군의 군선 중 대선 위주로 20척 이상을 분멸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인명 손실은 얼마나 되었을까. 안골포 해전만의 일본군 인명 피해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종합할 경우 9,000여 명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으며 인명 피해만 다소 발생하였다. 그런데 안골포 해전만의 피해에 대해 기술한 자료는 없다.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에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에만 언급하고 있다. 즉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19명, 부상 11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같은 비율로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에 적용할 경우 조선 수군의 총 전사자는 50명 내외이고, 부상자는 260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중 안골포 해전의 경우는 한산도 해전의 적선이 73척이고, 안골포 해전이 42척이므로 7:4의 비율을 적용할 경우 사망자 18명 정도, 부상자 약 95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안골포 해전은 일본 수군을 대표하는 2명의 장수가 지휘한 정예 수군을 조선 수군이 물리친 해전이다. 비록 규모 면에서 한산도 해전보다 작지만 정예 수군이라는 점에서 의미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만약 조선 수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후 그대로 물러났다면 이후 언젠가 또 다른 일본의 정예 수군 함대와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거제도 서쪽 남해 상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일본의 정예 함대를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파한 것이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측에서도 만약 한산도 해전만 치렀을 경우 전열을 재정비하여 조선 수군과 일전을 불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골포 해전에서 그들의 수군 최고 지휘관이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전투를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골포 해전도 전황에 미친 영향과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해전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었지만 소선 20여 척을 남겨둠으로써 육지로 도망간 일본군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지 못하도록 배려한 점은 곧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의 대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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