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61
한자 馬山三鎭義擧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진동면 고현 의거가 마산 삼진 의거의 계기가 됨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 진동, 진전, 진북면 민들이 일으킨 만세 시위로 마산 삼진 의거로 불림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마산 삼진 의거 종결
발생|시작 장소 마산 삼진 의거 발생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마산 삼진 의거 종결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지도보기
관계 장소 8의사 창의 탑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 고현 마을 입구지도보기
성격 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수동|김영종|구수서|변상술|변우범|변종열|변상복|변우섭|변상섭|권영대|권태용|황태익|변상헌|변갑섭|김영환|고앙주|이기봉|김호현|홍두익|백승학|황치순

[정의]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 3개 지역 주민이 연합하여 봉기한 만세 시위.

[개설]

1919년 3월 28일에 일어난 진동면 고현 의거를 뒤이은 만세 시위다. 고현 의거에서 검거되지 않은 변상태, 변상헌, 권영대, 권태용 등이 비밀리에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진동면을 비롯한 진전면진북면 일대의 지도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거사일을 음력 삼월 삼짇날인 4월 3일로 결정하고 주동자들은 서당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서당을 중심으로 한 유교 세력과 개화된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4월 3일 거사일에 진전면 양촌 마을 양촌 냇가 둑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었다. 오전 9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군중 수가 2,000명을 넘었으며 점차 늘어났다.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진동 읍내 장터[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진입했다. 일제의 당시 기록에는 주동 인물들이 ‘십인장(十人長)’, ‘이십인장(二十人長)’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감고 시위대를 이끌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10명 혹은 20명씩 조직을 만들어 치밀하게 의거 현장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역사적 배경]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마산 지역[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경과]

시위 군중들이 진동 읍내 장터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동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사동교 다릿목에서 일본군과 대치하였는데 일본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당시 23세인 김수동이 죽었고, 변갑섭도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오후 3시 마산의 중포병 대대 병력이 증파되었고, 잔학하게 진압되고 있었다.

[결과]

일본군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는 끝이 났고, 사상자는 8명의 사망자와 22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는 이름이 밝혀진 사람만 집계한 것으로 실제로는 그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숨을 잃은 8명은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앙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이었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2년형을 받은 사람이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등이며 징역 1년형을 받은 사람은 변상섭, 변상술, 구수서, 변상헌, 김영종, 변우범 등이었다. 1963년 10월 삼진면민들은 순국한 8 의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237번지 고현 마을 입구에 8의사 창의탑을 세웠다.

[의의와 평가]

진동, 진전, 진북 3개 면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만세 운동이다.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주동자들이 ‘십인장’, ‘이십인장’이라고 쓴 흰 수건을 두르고 시위대열을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의 시위와 달리 매우 조직적이었던 의거였다고 추정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