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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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泰國 |
이칭/별칭 | 송부(松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66년 - 김태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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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9년 - 김태국 낙향하여 후진 양성 |
몰년 시기/일시 | 1624년 - 김태국 사망 |
거주|이주지 |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
부임|활동지 |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
묘소|단소 | 김태국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전주진관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충청도 보령 지역으로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한 문신.
[개설]
김태국(金泰國)[1566~1624]은 광해군 12년에 관직을 버리고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고향으로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송부(松阜)이다. 형은 전라감사 김태정이다. 아들 김신행(金信行)과 김근행(金謹行)이 각각 생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활동 사항]
보령 지역에 광산 김씨가 세거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초토사(招討使)로 왜구를 격퇴하고, 조선 건국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조를 지키며 자결하였던 김성우(金成雨)[1327~1392]가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광산 김씨는 보령에서 세거하며 토착적 기반과 학문적 영향력을 꾸준히 성장시켜 나갔다. 김태국은 김성우의 후손이며, 선조 때 음사로 금산군수, 전주진관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김태국의 기반은 고향인 보령 지역이었고, 말년에 고향에 머물다 사후에 묘를 보령에 조성하였다. 김태국의 두 아들 김신행과 김근행이 사마시에서 입격했을 때에 방목(榜目)에 기록된 거주지는 모두 한양[서울]이었다.
김태국은 선조~광해군 대에 관료 생활을 하며, 선조 대에 평양판관, 고부군수 등을 지낸 것이 확인되고, 광해군 대에는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를 종묘에 봉안하려 하자 아무리 왕의 생모라 하더라도 왕후가 아닌 빈을 종묘에 봉안할 수 없다고 상소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김태국의 의연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619년(광해군 12)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보령 청라에 낙향하여 강학(講學)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묘소]
김태국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