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54
한자 朴東善
이칭/별칭 자수(子粹),서포(西浦),정헌(貞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2년연표보기 - 박동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박동선 진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박동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관리에 선발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박동선 병조좌랑 임명, 남포현감에 보임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박동선 이몽학의 난 진압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박동선 남포현 왜군 침입 시 고을 사람들을 구함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박동선 참의 임명 후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박동선 폐모론에 반대하고 낙향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박동선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피난시킴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박동선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로 피난시킴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박동선 병자호란 때 왕손을 강화, 교동, 호서 등지로 피난시킴
몰년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박동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40년 - 박동선 정헌(貞憲) 시호 추증
부임|활동지 부임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반남
대표 관직 좌참찬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일원에 있었던 지명인 남포현의 현감을 지낸 조선 후기 문신.

[개설]

박동선(朴東善)[1562~1640]의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포현감으로 백성을 보호하였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에는 왕손을 호위하였다.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조년(朴兆年), 할아버지는 박소(朴紹),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다. 어머니는 순천 김씨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 이걸(李傑)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동선은 1589년 28세에 진사에 입격하였는데, 거주지는 한성이었다. 이듬해 증광별시에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선조 대에 예문관 검열을 맡아 선조 임금을 가까이서 인견(引見)하였다. 1593년(선조 26)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1594년(선조 27)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거쳐 사간원 정언을 지내던 중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등에 업고 피난을 갔으며 숨어 지냈다. 이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피난할 때 머무르던 곳]에 뒤늦게 도착했던 것이 문제로 거론되었으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여 체차(遞差)[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되지 않고 다시 출사하였다.

이때에 동인(東人)의 모함을 받던 정철(鄭澈)[1536~1593]을 비호한다는 비판을 받아 체차하게 되었지만, 다시 남포현감에 제수되어 1596년(선조 29)에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곧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박동선에게 기록할 만한 공이 있다고 하였지만, 곧바로 포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기록[30권, 29년 7월 1일 병인조]에 박동선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남포현감 박동선은 변란의 소문을 듣자 곧 충청수사(忠淸水使)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로 나아가 홍주를 구원하고자 하였지만, 수사는 수군이 어찌 육지에서 싸우냐며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박동선은 급박한 상황에서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말해서는 안 된다며 곧 수영의 군병을 동원한 후 보령현감(保寧縣監) 황응성에게 보령의 군사를 소집해 함께 홍주성으로 들어가자고 하여 홍주성 수호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책훈(策勳) 과정에서 박동선만 제외되니,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남포로 들어오자, 충청수사 최호에게 남포의 동쪽 옥마봉을 차단하자는 계책을 내었지만, 수사가 따르지 않았고, 끝내 왜군이 웅천천을 거슬러 성주사를 거쳐 옥마봉을 넘어오게 되었다. 이에 박동선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내주어 백성들의 피난을 도왔다.

1599년(선조 32)에 병조정랑으로 있던 중 “국가에 헌신할 생각은 안 하고 대단치 않은 병을 핑계 삼아 봉사의 직임을 모면하려 하였다.”라는 사헌부의 보고에 의해 추고(推考)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경기도사로 활동하는 것이 확인되며, 1600년(선조 33)에 표리(表裏)[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1601년(선조 34) 뒤늦게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공을 헤아렸는데, 이때 영의정 이항복(李恒福)[1556~1618], 우의정 김명원(金命元)[1534~1602]은 박동선은 3등에 해당한다고 하였지만, 여전히 조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 1603년에 사헌부에서 청난공신(淸難功臣)[조선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의 개정을 논할 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후 군자감 정, 사복시 정에 제수될 때에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박동선의 이름 옆에 “재주가 범상하다.”는 주석을 기록하였다. 통례원 좌통례, 통례원 상례, 부평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 즉위 후 안동부사 등을 지내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종일관 반대하여 훗날 ‘우뚝하게 홀로 선 자들’로 평가를 받았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124권 10년 2월 10일 경자조]. 그러나 이 일로 광해군 대에 역적이란 비난을 받으며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날 정도였지만, 시행되지는 않았다.

인조(仁祖)[재위 1623~1649] 즉위 후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박동선은 타고난 자질이 부드럽고 후하나 일을 당해서는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충청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1624년 대사헌이 되었고, 1625년 이조참판에 이어 의정부 우참찬, 1626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교동·호서 등지로 피난했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박동선 사망 후 실록의 졸기에 박동선이 조정에서 50년간 하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고,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는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서포기문(西浦記聞)』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황의천, 『보령의 인물』(보령문화원, 2015)
  • 두산백과 두피디아(https://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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