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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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壽 |
이칭/별칭 | 덕옹(德翁),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710년 - 이창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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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이창수 알성문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49년 - 이창수 대사성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4년 - 이창수 대사간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이창수 전라도관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8년 - 이창수 이조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8년 - 이창수 병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63년 - 이창수 이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63년 - 이창수 해남 귀양에서 석방 |
활동 시기/일시 | 1772년 - 이창수 수어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77년 - 이창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78년 - 이창수 문헌(文憲) 시호 추증 |
묘소|단소 | 이창수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관직 | 홍문관제학|병조판서|이조판서|수어사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창수(李昌壽)[1710~1777]는 조선 후기 영조 때에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낸 문신이다. 이창수의 후손들이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옹(德翁)이다. 세종의 아홉째 서자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1435~1477]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백린(李伯麟)[1621~1667], 할아버지는 병조참판 이언강(李彦綱)[1648~1716]이다. 아버지는 이태제(李泰躋)이며, 어머니는 칠원 윤씨(漆原 尹氏)로 정언(正言) 윤지화(尹志和)[1660~1704]의 딸이다. 이민제(李敏躋)에게 입양되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이창의(李昌誼)[1704~1772]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이창수는 1735년 증광시(增廣試)에 생원으로 입격하고,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 기재된 거주지는 모두 한성[서울]이다. 문과 급제 후 바로 정언이 되었으며, 선천부사(宣川府使), 교리·응교·집의·부교리·부응교·승지·황해수사, 우승지·영흥부사(永興府使)·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754년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1756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 병으로 체직(遞職)[임기 만료, 공로, 과실 혹은 상피(相避) 등으로 관원의 관직을 교체하는 인사 제도]되었다. 그 뒤 도승지(都承旨)·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판윤,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병조판서·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761년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우참찬·지경연,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1763년 해남(海南)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났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다시 등용되어 판의금부사·한성판윤·예문관제학·형조 판서·수어사·내의원제조·홍문관제학·판돈녕부사를 두루 역임한 뒤, 1772년 마지막으로 수어사(守禦使)를 지냈다.
이창수의 외할아버지 조태일(趙泰一)[1665~1707]은 양주 조씨로 양주 조씨 보령 입향조 조계원(趙啓遠)[1592~1670]의 손자이다. 충청남도 보령에 세거하는 외가와의 인연으로 보령에 기반이 있었다. 이창수의 증손자 이교빈(李敎彬)[1820~1886]이 창암리에 거주하면서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유고집』 2권과 『간찰집』 3권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에 있다. 아들 이병정이 지은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78년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