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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읍 항일 의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427
한자 昌原邑抗日義擧
영어의미역 Anti-Japan Undertaking to Worthy in Changwon-eup
이칭/별칭 창원읍민 만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2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창원읍
관련인물/단체 배중세|설관수|공도수|송석민|김호원|신갑선|조윤호|조희순|구재균|김영근|사치홍|감태순|박화열|배용문|장상오|김상전|김개동|김기문|김도근|김수원|사치홍|심상린|이태호|공재천|김창실|신수현|안갑석|최개동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창원읍 항일의거는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해 3월 23일과 4월 2일 창원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년에 걸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헌병경찰제를 통한 무력을 앞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항일 독립 정신이 지속적으로 고취되고 있었으며,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대두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고종의 붕어가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도 창원읍을 포함하는 여러 지역 주민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발단]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상남면 토월리에 사는 배중세(裵重世)가 중앙으로부터 급히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창원면 동정동에 사는 설관수(薛灌洙)에게 전해 주었다. 설관수는 중동청년회관에서 마을 사람들과 비밀리에 거사 준비를 모의하여 3월 23일 창원읍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배중세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공도수(孔道守) 등과 함께 밤을 새워 500여 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소답동에 사는 송석민(宋錫敏)중동에 사는 김호원(金浩元)은 태극기 500여 개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이날의 거사를 위해 신갑선(申甲善)은 마산·웅천·상남, 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북면, 서상동구재균(具在均)·동정동의 김영근(金永根)은 창원읍내, 사치홍(史致洪)은 동면의 연락과 민중 동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창원보통학교와 창흥학교(昌興學園)의 학생 동원도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경과]

1919년 3월 23일 장날이 되자 창원읍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때 공도수, 송석민 등의 주동자들이 창원보통학교[현 창원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 곳곳에 있던 6,000여 명의 대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사이에 태극기가 나눠지고 독립선언서도 뿌려졌으며 주동자들은 일본 헌병을 교란시키기 위해 동원된 창원보통학교 학생들을 분산시켜 창원읍 주위의 산에 배치하고 만세와 함성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진압을 위하여 마산주재 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 등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다. 급보를 받고 도착한 증원 병력은 총기를 휘두르며 폭력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경찰의 무차별 진압으로 이날 시위에서 31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위는 오후 5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날 체포되지 않았던 몇 사람의 주동자들은 다시 청년들을 규합하여 4월 2일 2차 의거 날을 정해 주변 동리에 비밀 연락을 취하였다. 4월 2일 오후 3시경 청년들이 시장으로 몰려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차 시위 때보다 더 많은 7,000여 명의 군중들도 상거래를 멈추고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헌병은 응원 병력의 지원 아래 주동자 몇 명을 검거하고 총검으로 사람을 난타하면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일본 헌병들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한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장에 있던 군중과 함께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과]

두 번의 독립만세운동 결과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는데, 그 중 20여 명이 가혹한 고문 및 심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중 감태순(甘泰舜)·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박화열(朴和烈)·배용문(裵龍文)·벽관수(薜灌洙)·신갑선(申甲善)·장상오(張相五)·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은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김상전(金相錢)은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공재천(孔在千)·김창실(金昌實)·신수현(申壽鉉)·안갑석(安甲錫)·최개동(崔介同) 등은 태형 90도(度)를 당했다. 그 외 김개동(金介同)·김기문·김도근(金道根)·김수원(金洙元)·사치홍(史致洪)·심상린(沈相璘)·이태호(李太鎬) 등의 경우 공소 제기 기록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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