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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725
한자 裵正世
영어음역 Bae Jeongs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상남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3년연표보기
몰년 1945년연표보기
본관 분성
대표경력 상남면 건국준비위원장

[정의]

해방 이후 활동한 창원 출신의 민족운동가.

[개설]

배정세의 아버지는 배홍기이고, 형은 의열단원이었던 배중세이다. 배정세상남면 건국준비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 해군경비대 군인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져 억울하게 죽었다. 미군 관여 하의 일본 해군군법회의에서 이 사건을 저지른 일본 군인들의 재판이 열렸는데, 10여 명의 일본인들이 죄질에 따라 형이 언도되었다. 10년형을 언도받은 일본 군인은 재판장이 수장 이유를 묻자 “상남면 배가(裵家)는 반일민족운동의 거두였기에 거류 일본인의 재산 보호와 철수에 위협을 느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배정세의 묘는 형 배중세와 함께 창원시 외동 창원병원 뒤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활동사항]

배정세는 일본 동경 입교대학(立敎大學) 상과를 졸업하고, 동경도(東京都) 성선(省線) 목백역(目白驛) 조역(助驛)으로 근무하던 중, 직장생활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것이라며 사퇴하라는 형 배중세의 권유로 8·15 이전에 귀향하였다. 대구광역시 동촌동에서 과수원을 하던 중 1945년 광복이 되자 전국의 열차바퀴를 제작하는 서울 철여회(鐵麗會)에 참여할 것을 위촉받았으나, 고향 유지들이 상남면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이에 응했다.

미군정이 들어서기 직전 일본 해군 육전대(陸戰隊)가 일본 해군이 사용할 수 없게 된 군수물자를 그들의 함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거나 소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 해군경비부를 방문하여 모든 물자의 반출과 소각, 그리고 매각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수품은 우리나라의 전리품과 같은 것이므로 임의처리하지 말 것과 일본 헌병대의 순찰차를 면의 행정용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 해군경비부에서는 1945년 8월 24일 그를 소환하여 미군정 실시 전까지의 치안 책임은 일본 해군에게 있으며, 군수물자 문제는 일본이 한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므로 한국인이 일본군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으며, 이 후 일본군의 일에 간섭하거나, 일본인의 철수에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배정세는 패전국민의 철수는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이나 군수물자 처리는 한국재산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돌아왔다.

일본 해군은 그가 항일 독립운동가 배중세의 아우인 사실을 알고, 다음 날 새벽 상남 일본 해군통신대 수병들로 하여금 배정세를 체포하게 했다. 배정세는 체포된 뒤 행방불명되었는데, 이 후 가족들이 미군정 당국에 진정하여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배정세는 일본군에 체포된 8월 25일 밤 수족이 묶인 뒤 백 근 무게의 쇳덩이를 양쪽에 단 채 바다 속에 던져졌다. 이렇듯 일본 해군의 만행으로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나 가족들은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묘소]

배정세의 묘는 형 배중세와 함께 창원시 외동 창원병원 뒤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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