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임진왜란 때 진해에 머물렀던 일본인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06
한자 壬辰倭亂-鎭海-日本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재우

[정의]

임진왜란 시기 진해 지역에 머물렀던 일본 사람.

[개설]

임진왜란 당시 진해 지역에는 일본 군대에 의해 축조된 웅천 왜성, 명동 왜성, 안골 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 많은 일본 장수와 일본인들이 머물렀다. 웅천 왜성은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가 초축을 했고, 고니시가 뒤를 이어 축성했으며, 명동 왜성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축성하였으며, 안골 왜성은 1593년 왜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가 축조하였다.

[일본인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건너와 진해에 머물렀던 일본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가 대표적이며, 포로였던 오타 줄리아가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1600]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로 1592년 제1군 선봉장이 되어 부산포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20여 일만에 한양을 점령하였으며, 그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침공한 장수이다. 그는 일찍 가톨릭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기도 하였다. 고니시는 웅천 왜성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명나라 군대와 1594년과 1596년 두 차례에 걸쳐 강화 회담을 개최하였다.

소 요시토시[1568~1615]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서 쓰시마의 도주였다.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직전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7월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의 명령으로 선조를 알현하고 공작 한 쌍, 조총 몇 정을 바쳤다.

왜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24세의 젊은이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인과 함께 제1군의 선봉장이 되어 전쟁에 앞장섰다. 1593년 말 명동 왜성에 들어온 소 요시토시는 웅천 왜성에 주둔했던 일본인 병사를 지휘하였다. 진해 지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던 사실이 세스뻬데스의 서신에 남아있다.

한편 웅천 왜성에 머물렀던 조선인 포로로 오타 줄리아[?~1651]가 있다. 오타 줄리아는 평양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이다.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에 그의 가묘가 있다. 그녀는 웅천 왜성에 머무르다 대마도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나가사키로 가서 고니시의 부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고니시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참수형을 당하자, 오타 줄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로 들어갔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라는 사실이 알려져 1612년 이즈오시마[伊豆大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고즈시마[神津島]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