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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 생도 창원 상남 지역 파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48
한자 海士生徒昌原上南地域派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 21일연표보기 - 해사 생도 창원 상남 지역 파견
종결 시기/일시 1950년 9월 26일연표보기 - 해사 생도 창원 상남 지역 파견을 마치고 해군 사관학교로 귀교
파견 장소 안남 초등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가양로 158[대방동 368]지도보기
파견 장소 성주 초등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로 127[가음동 25]지도보기
관련 인물/단체 해군 사관학교

[정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진해 지역에 있던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을 인근의 창원 상남 지역으로 파견한 사건.

[개설]

6·25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어 북한군이 마산 가까이까지 진격하여 오자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마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해에 있던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진해 군항 방위 사령부가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계획에 따라 사관생도들은 1950년 7월 21일부터 창원과 진해의 경계인 안민고개를 넘어 창원 상남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역사적 배경]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마산 인근까지 진격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해군 사관학교에는 4기생부터 7기생까지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5기생은 함상 실습을 위하여 부산에 갔다가 6월 27일 귀교했다. 생도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마치지 못한 생도 신분이었기 때문에 실전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이에 해군 사관학교 교장 김장훈 대령은 생도들에게 “생도여러분은 일체 동요하지 말고, 조국이 부르면 출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라”고 훈시하였고, 생도들은 정상 수업을 전면 중단하고 해안 경비에 주력하면서 총검술을 비롯한 육상 전투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일부는 바다를 방어하기 위하여 부도(釜島)에 파견되었다.

그러던 중 북한군이 마산 인근까지 진격해오는 등 전쟁 상황이 긴박해지자 진해 통제부 진해 군항 방위 사령부를 개편하고 해군 사관학교를 사령부의 제3대대 독립대대는 편입시켰다. 당시 진해 지구 기관장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진해를 지키기 위해 사관생도들을 전투 부대로 배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김장훈 대령이 동의함으로써 생도들이 창원 상남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김장훈 교장은 “생도들을 소모품처럼 일선에 배치하는 것이 정말 가슴아프다.”고 말끝을 잇지 못했으며, 생도들은 출전 명령에 다음과 같이 심정을 토로했다. “어머니, 이 자식은 조국의 운명을 등에 지고 깨끗이 싸우다가 한 나라의 꽃으로 질 것을 맹세합니다. 부디 길이길이 안명하옵소서!”라 하고, 유서를 작성했다.

[경과]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이 소속된 진해 군항 방위 사령부 제3대대의 방어 지역은 장복산 기슭이 시작되는 마산만 북쪽 끝의 봉암교 부터 불모산 기슭까지 직선거리 약 10㎞였다. 이 지역은 창원 북쪽의 산기슭과 장복산 주능선이 에워싸고 있는 구역으로 면적은 약 200㎢에 달했다. 행정 구역은 현재의 창원시 상남구 웅남동상남동을 포함하는 곳인데, 특히 장복산 줄기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진해 지역은 바다와 붙어있는 곳으로 장복산 일대는 사활을 건 방어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견된 생도들은 안남 초등학교성주 초등학교에 본부를 두고, 도로 경비 및 야간 매복 훈련을 하는 등 실전 대비 태세를 갖추면서 천주산 등지에 출몰하는 북한군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무병 1명과 생도 1명이 전사했다. 7월말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과 8월에 있었던 해병대의 마산~진동 사이의 보급로 확보, 그리고 통영 상륙 작전을 성공함으로써 1950년 9월 26일에는 다시 해군 사관학교로 돌아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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