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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488
한자 瞻斗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58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31년연표보기 - 첨두 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첨두 서원 폐쇄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5년 - 첨두 서원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1년연표보기 - 첨두 서원 신축
현 소재지 첨두 서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589 지도보기
성격 서원
정면 칸수 강당 5칸
측면 칸수 3칸
관리자 교하 노씨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에 있는 재실.

[개설]

첨두 서원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공을 세워 선무 원종 이등 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노경종(盧景宗)을 추모하여 교하 노씨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로 1981년 향교 유림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으로 승격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1731년에 서원으로 건립되었다가 고종 시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1947년 복원 이후 1950년에 소실되었다가 1955년에 재건되었다고 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첨두재로 건립되었다가 1981년 유림의 공의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에 발행한 『첨두 서원지(瞻斗書院誌)』의 중건기에 따르면 근자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고 하여 서원으로 승격된 것이 근래임을 내비쳤고, 같은 책자의 ‘교하 노씨 양현 세덕비명(交河盧氏兩賢世德碑銘)’에서는 서원을 지은 뒤 난리와 훼철령으로 헐었다 다시 지었다고 하여 철폐령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시사했다. 첨두 서원은 6·25 때 소실되어 두 차례 중건하였으며, 최근에는 도시 계획에 따른 토지 문제로 2001년에 신축하였다. 이때 백산재(白山齋)에서 채례를 지내던 노정직(盧廷直)을 주향으로 삼고, 노경종을 배향하였다.

노경종의 자는 효성(孝誠), 호는 명암(明庵)이며 1555년 창원에서 태어났다. 노경종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계성을 지키며 크게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올랐다.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하자 이때도 역시 왜적을 소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1603년에 특설 무과에 합격하여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揚衛副護軍)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 시기 영창 대군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내려와서 거처하는 집을 첨두헌(瞻斗軒)이라 이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첨두’라는 이름은 대개 밝은 낮이라도 북두를 바라볼 때에 공북(拱北)의 정성을 잊지 않으려는 공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정문의 편액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한 것도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1625년 노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사림과 자손들이 이 집을 서당으로 이용하여 학문 연구의 장으로 삼음과 동시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노산사(盧山祠)와 재실인 첨두재(瞻斗齋)를 세웠다. 해방 후 다시 서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589에 위치한다.

[변천]

첨두 서원은 1731년에 창건되었다가 대원군 집권 시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 해방 후 1947년에 복원되었다가 1950년 6·25 중에 소실되었고, 그 후 중건하였으며, 2001년에 신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첨두 서원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첨두서원의 강당 서쪽에 사우가 배치된 이른바 서묘동학의 구조이다.

[현황]

첨두 서원 정면에 ‘첨두 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서쪽에 사우인 노산사와 내삼문인 집의문(執義門)이 있다. 동쪽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첨두재가 있다. 마당에는 교하 노씨 양현 세덕비(交河盧氏兩賢世德碑)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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