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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058
한자 文錫胤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문석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문석윤 일제의 군용지 땅값 수령 거부 운동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문석윤 일제의 진해 웅동 수원지 축조공사 결사 저항
몰년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문석윤 사망
출생지 문석윤 출생지 - 경상남도 진해시
성격 항일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향장

[정의]

한말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활동 사항]

문석윤(文錫胤)[1879~1913]은 1904년 경상남도 진해 웅천현의 향장(鄕長)이 되었다. 1904년 일제가 가덕도에 육군 포병대를 설치한 것을 보고 반일(反日)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문석윤은 현대적 교육을 통해 민족적 역량을 높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자 다짐하였다. 현대적 지식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마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배익태(裵翊台), 이병두(李柄斗) 등과 함께 계광 학교(啓光學校)의 전신인 창동 학교(昌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봄 일제가 진해 덕산동에 군용지를 만들기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농지(農地)를 매입하자 문석윤은 배달원(裵達元) 등 청년들과 함께 땅값 수령거부 운동을 하였다. 1910년 일본 해군이 관남리 등의 4개 마을 주민을 몰아내고 웅동 수원지 축조공사를 하자 이에 격렬히 저항하다가 일본 해군 함정에 연행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였다. 이 일로 문석윤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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