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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9076
한자 義林寺
이칭/별칭 봉덕사(奉德寺),봉국사(奉國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의림로 382[인곡리 439]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범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688년연표보기 - 의림사 창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4년 2월 16일연표보기 - 의림사에 있는 의림사 3층 석탑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72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1월 14일 - 인곡리 모과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77호 지정
현 소재지 의림사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의림로 382[인곡리 439]지도보기
성격 사찰
창건자 위웅 대사
전화 055-271-3054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 교구 본사 범어사 소속 사찰.

[개설]

의림사는 마산 9경의 하나인 의림사 계곡을 끼고 있는 전통의 천년 고찰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 여항산(餘航山) 자락에 자리 잡아 예로부터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즐겨 찾는 조용한 휴식처로 이름이 높았다. 긴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조용한 숲길과 수목이 우거진 계곡의 맑은 물, 그리고 시원한 그늘을 가지고 있는 의림사는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넓은 경내에는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인 의림사 3층 석탑을 비롯한 당간지주와 수백 년의 수령을 가진 거대한 모과나무가 있다. 또한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래된 부도군이 있어 의림사의 긴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찰의 오랜 역사에 비해 잦은 전란과 특히 6·25 전쟁의 최후 접전지가 바로 의림사의 인근이었던 관계로 유물과 유적이 병화로 인해 거의 사라져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절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해병대 진동리 지구 전첩비’가 우뚝 서 있어 이 지역의 치열했던 과거사를 일러주고 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 여항산 기슭에 있는 의림사는 688년(신문왕 8) 위웅 대사(爲雄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절 이름은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신문왕이 빈번한 왜구의 약탈 행위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원력으로 창건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봉국사(奉國寺)라 이름 했다고 한다. 한편 사중에서는 봉덕사(奉德寺)라 했다고 전하며, 조선 초기까지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로 선종(禪宗)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해지는 최근의 의림사 창건에 대한 문제는 창건주나 시기 등에 대해서 전혀 일치함이 없고 근거가 없으므로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다. 그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창건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의 삼국 통일 직후 688년(신문왕 8)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는 설, 둘째 고려 시대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역사적인 기록이나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 9세기 양식이라고 하여, 늦어도 그 당시에는 이미 사찰이 존재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중의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창건 당시의 이름은 봉덕사(奉德寺)였다고 한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발발로 전국토가 왜구의 발아래 유린되자, 당시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1,500여 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자 인근 각지에서 의병이 숲[義林]처럼 모여들었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지금의 의림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림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때까지는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당시에도 의림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사명(寺名)의 사실 관계도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의 대다수 사찰과 마찬가지로 의림사도 쇠락의 길로 들어섰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797년(정조 21) 반포한 ‘장용영 공문(壯勇營公文)을 보면 의림사 몰락의 전말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진해 현감 명의로 된 일종의 공문서인데 그 내용에 ‘본영(本營)의 침해가 있어 사찰이 폐사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므로, 이후로는 납징(納徵), 즉 일종의 세금을 모두 없애겠다’는 훈령이 담겨져 있다. 내용으로 봐서 이 지역의 수군 기지인 수영(水營)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의림사에 과도하게 요구하였으므로 절의 살림이 거의 폐사될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절에서 먹고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승려들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주인이 떠난 절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799년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의림사여항산에 있다’고 하고,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가람고(伽藍考)』에도 ‘의림사는 군에서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대령지(大領志)』에도 의림사란 이름이 나오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중창된 후 계속 존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대 이후에 제작된 『의림사 도형(義林寺圖形)』이라는 지도를 통해서 당시의 사찰 규모를 살펴보면 그때까지는 상당히 큰 도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법당, 노전(爐殿),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국사영당(國師影堂), 청원루(淸遠樓), 영원당(永元堂), 금장각(金藏閣), 북암(北庵), 남암(南庵) 등이 있다. 그 이전에 세웠던 보광전(普光殿), 관음전(觀音殿), 천왕문(天王門), 청하당(淸霞堂), 백하당(白霞堂), 만월당(滿月堂), 망월암(望月庵), 동암(東庵), 해행당(解行堂), 미타전(彌陀殿) 등도 나와 있다. 또한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월정암(月精庵), 옥계암(玉溪庵) 등의 산내 암자를 7개소나 두고 있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의림사는 전각의 수나 도량의 규모가 여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며 산내 암자는 한 곳도 남아있지 않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채색 지도인 이 자료는 현재 서울 대학교 소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호국 도량의 역사가 깃든 의림사라 할지라도, 조선 후기 사회의 숭유억불이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조금씩 새롭게 중창한 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모두 6·25 전쟁 이후에 새롭게 중창 및 건립한 것으로 대웅전, 염불당, 나한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그리고 종무소로 사용하는 시설물 등이 있다. 현재 주지는 승려 경선이며 신도 수는 약 1,200여 명이라고 한다.

[관련 문화재]

의림사에는 3층 석탑과 3기의 부도가 있다. 염불당 앞에 있는 ‘의림사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주변에는 석등의 하대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1974년 요사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면서 일부를 보수했는데, 현재의 높이는 3m이다.

의림사 부도군(浮屠群)은 절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있는 3기의 부도이다. 모두 석종형(石鐘型) 부도로, 가운데 한유당(閑遊堂) 부도와 그 오른쪽 부도는 4각 옥개석을 눌러쓰고 있다. 한유당 부도는 명문을 옥개석에 새긴 점이 특이하다. 가장 왼쪽 부도는 탑신이 잘린 듯 연화대석 사이에 8각 석재가 끼워져 있다.

한편 의림사 경내에 들어서면 삼성각 앞에 서있는 거대한 모과나무를 볼 수 있다. ‘창원 인곡리 모과나무’로 1985년 1월 경상남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된 보호수이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삼성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나무는, 높이가 무려 10m에 달하며 가지들이 15m나 뻗쳐나갈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국내의 모과나무로는 희귀한 거목으로 그 위용으로 인해 의림사를 찾는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 될 정도이다. 그 주변에는 높고 낮은 작은 불탑들이 즐비하게 새워져있다.

이 외에 의림사에는 당간지주가 있는데 각각 2쌍씩 경내 염불당 앞과 경외지에 있다. 당간지주는 당(幢)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을 말한다. 특히, 경외의 당간지주는 경내의 당간과는 별도로 인근 마을에 의림사 행사를 알리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5.06.09 내용 수정 쌍계사의 말사->범어사의 말사로 수정(20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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