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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9159
한자 鎭海神社
분야 역사/근현대,종교/신종교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태평로37번길 17[제황산동 28-1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성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진해 신사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 8월 16일연표보기 - 진해 신사 해체
최초 설립지 진해 신사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태평로37번길 17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

[설립 목적]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경찰과 군대였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다.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 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 천황·유명 귀족·무사·문신·조상신 등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여러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의 신을 모시는 신사, 된장 신을 모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 신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 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등이 있고,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변천]

진해 신사는 1916년 6월 6일 건립이 허가되었다. 일제는 1929년에는 신사 바로 위 제왕산(帝王山)에 러일 전쟁 25주년을 맞이하여 거대한 ‘일본해 해전 기념탑’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신사 참배 문제는 각지에서 큰 문제였는데, 기독교의 신사 참배 문제는 특히 더욱 심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인을 전시 체제에 동원하기 위한 황민화 정책이 강화 될 즈음에는 신사에서의 강제 참배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8년 9월 10일 진해, 상남, 웅남 장로교회에서는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하고 각 관계 당국에 결의문까지 발송하였다.

해방 후 일부 신사는 조선인들 손에 파괴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사들은 신관이나 관계자들의 손에서 해체되는 의식이 행해졌다. 조선 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동시에 조선 신궁에 안치해 두었던 어령대를 동경 궁내성으로 돌려보내고 각 지역의 신사에서는 신령을 하늘을 통해 본국으로 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 일제히 실시하게 했다. 진해 신사의 경우에도 ‘신체’는 신사 관계자의 손에 의해 태워지고, 신보(神寶)인 칼은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후 각지의 신사는 대부분 공원이나 도서관, 학교 등 공공시설로 이용되었으며, 진해 신사의 부지는 현재 남산 초등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총독부는 1915년에 신사 설립의 기준과 그 인가 절차를 정한 「신사 사원 규칙」을 발표하고, 일본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각 지역 대부분의 신사들이 총독부로부터 공인, 정리되었다. 일제는 1925년에 한반도에서의 신사 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서울 남산에는 5년여의 공사 기간에 걸쳐 조선 신궁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조선 신궁은 한반도에 이주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문화와 신앙심까지도 교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 신궁 건립을 계기로 신사는 조선인에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여 조선인을 일본인화(日本人化) 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기독교 탄압으로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중국 대륙 침략의 첫발로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이어서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으며,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 총독부가 각 기관, 학교, 민간 유지, 종교 단체로 하여금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이었다. 그 이듬해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조직되었는데, 그 하위 기관으로 애국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애국 반원과 경찰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매일 아침 시민들의 참배 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 말기에 애국 반원은 4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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