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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의 헛난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11196
한자 -亂離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1년 - 「돌리의 헛난리」 『진해의 민속』에 수록
성격 역사 사실담
주요 등장 인물 쇼오고|배효준|김시영|우휘수
모티프 유형 항일(抗日)|사실담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에 전승되는 실화.

[채록/수집 상황]

『진해의 민속』[진해 웅천 향토 문화 연구회, 2001]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창원시 진해구 석동 뒷산에는 풀들이 잘 자라서 방목하기 알맞은 버덩[나무없이 풀만 우거진 들]이 있었다. 이곳에 경술국치 이후에 마산부의 일본인 관리의 아들 ‘쇼오고’가 와서 멋대로 과일나무를 심어서 과수원을 만들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동민들에게 모멸적인 언사를 하며 오만불손하게 굴어 동민들의 분격을 샀다. 소의 목초지를 점탈당한 것도 불쾌한데 그 언동도 괘씸하여 이장인 배효준을 중심으로 김시영, 우휘수 등이 모여 목초지를 복구하고 쇼오고를 추방할 모의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궐기하여 쇼오고가 심은 나무를 뽑아버리고 대신 구하기 쉽고 잘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거사일은 1912년 5월 12일로 잡고 집집마다 100그루씩의 꺾꽂이 버드나무를 준비하여 나오기로 합의 하였다. 그날 궐기한 마을 장정은 80여 명이었다. 이 많은 장정들이 과수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쇼오고는 진해 경찰서 경화파출소에 고발을 하였다.

일본인 순경 두 사람이 와서 총검으로 위협하며 제지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대항을 하였고, 일본인 순경은 겁을 먹고 도피를 하다가 다급하여 논에 빠지고 말았다. 동민들의 기세가 그러하자 이번에는 쇼오고가 진해경찰서에 고발하였다. 고발을 받은 진해경찰서에서는 예사로운 봉기가 아니라고 보고 무장 일본 경관을 앞세우고 흉기를 든 일본인, 의용 소방대원, 일반 일본인 300여 명을 동원하여 대 집단으로 석동에 쇄도하였다. 무기를 든 일본인들이 어떤 만행을 할지 몰라 장정들은 마을을 떠나 뿔뿔이 피신을 하였다.

작업장에서 장정들이 모두 종적을 감추어 버리자 일본 경찰은 일단 철수를 한 후 밤중에 마을에 들이닥쳐 등불을 들고 쇠창으로 볏섬, 볏가마니들을 찔러 보는가 하면 장독을 깨뜨리며 장정들을 찾느라고 눈에 불을 켰다. 도피를 하고 있던 주동자들은 일본인들의 보복이 염려스러웠고, 마을의 평온도 빨리 찾는 것이 좋겠다 여겨 도피 사흘째 되는 날 진해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경찰서에서는 그들의 떳떳한 주장에 큰 죄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 봉기를 ‘돌리 헛난리’라고 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경남에서 최초로 일으킨 항일 농민 봉기였다.

[모티프 분석]

「돌리의 헛난리」는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석동에서 일본인에 대한 반일 감정이 농민 봉기에 이르게 된 사건을 주요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일본 관리인 쇼오고가 목초지를 주민들과의 상의 없이 임의로 과수원으로 개간하자 이에 지역 농민들이 단체로 반발한 것이다. ‘돌리’는 석동의 우리말 지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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