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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른 시기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10103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정헌

귀산본동에는 가야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어, 귀산동의 해안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똘똘개마을 역시 그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귀산동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진해시와 경계를 이루는 귀산동주민센터가 있는 곳의 북동쪽 야산 소나무가 울창한 산속이다.

귀산동 고분군창원분지 내의 가야시대 고분군과 비교·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분묘 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귀산동 고분군이 입지하고 있는 귀산 일대는 장복산(長福山)이 남서 방향의 해안가로 쭉 뻗어 내려오다가 귀산 일대에 이르러 용호 쪽과 석교 쪽으로 두 갈래의 소지역으로 펼쳐진다. 귀산동 고분군은 유적의 위치, 분포 양상,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볼 때, 채집유물 등 물적 증거는 빈약하지만 가야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분군으로 판단되며, 앞으로 계속적인 현장 확인이 요망되는 유적으로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또 마을 뒷산인 빈대골에는 절 터로 추정되는 여러 유물들과 정황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빈대골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쓰인 석비는 물론이고 다수의 석재들과 주민들의 증언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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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바라 본 빈대골

귀산동을 품고 있는 산성산[일명 봉화산] 중턱에 있는 동제 제당에서는 귀산본동과 석교마을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부터 동제를 지내 왔다고 하는데, 이 제의는 현재도 해마다 동민들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유적과 풍습들을 통해 볼 때 석교마을은 역사 시기의 이른 때부터 창원 해안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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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동 동제 제당

현재 석교마을에는 김해김씨, 전주이씨, 정선전씨, 풍산홍씨, 창녕조씨, 장수황씨 등 총 48가구 120여 명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석교마을 입향조는 고(故) 김순삼의 5대조라는 말도 있으나, 석교마을은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웃 비봉마을에 일본군의 탄약창(현재 해군의 진해기지사령부 내)이 들어서면서 비봉마을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의 이야기로는 전주이씨 집성촌이었던 비봉마을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예부터 물이 풍족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해야만 했는데, 잘 사는 부유층 사람들은 진해 방면으로 나가고, 비교적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석교마을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2가구가 마을 주민으로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다.

[정보제공자]

이두봉(남, 1930년생, 석교마을 거주)

이철이(남, 1940년생, 석교마을 거주)

정순악(여, 1937년생, 석교마을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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