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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돛배 떠나고 웅남호가 그 자리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20102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정헌

석교마을 사람들은 물론 귀산본동 사람들은 누구나 웅남호에 대한 추억들을 갖고 있다.

황포돛배는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언제부터 언제까지 운항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긴 시간이 지나 기억 속에서 잊혀 버린 것이다. 황포돛배와 동력선인 웅남호의 교체 시기도 사람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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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남호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황포돛배가 더 이상 운항하지 않자 또 다른 교통수단인 웅남호가 그 자리를 잇게 되었다는 말도 있고, 동력선인 웅남호가 운항하면서 황포돛배가 운항되지 않았다고도 한다. 하여튼 인근 도시인 마산으로 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물산을 판매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뱃길뿐이었기에 석교마을에 사는 나이든 분들의 기억 속엔 동력선 웅남호에 대한 추억들이 남다르게 남아 있는 듯하다.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웅남호 뱃길은 다음과 같다.

출발은 마산 어시장의 뱃머리인 ‘홍콩빠’ 주변이었는데 현재 남성동 농협 근처였다. 이곳에서 봉암을 거쳐 적기 혹은 적현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삼미특수강 자리를 지나 일본인 집이 몇 채 있던 광산에도 배가 가는 때도 있었다.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금을 캐기 위해서 집을 짓고 산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예전부터 오 씨들 몇 가구가 살고 있던 곳이다.

광산과 안골을 거쳐 현재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창원공장이 있는 귀현을 지나고, 학교가 있는 구실(귀곡)에서 손님들을 태우고는 다시 손 씨들 네 가구 정도가 살고 있던 손날과 똥골을 거쳐 비앙개[일명 배앙개]로 불렀던 용호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현재 법정동명이 귀산동인 갯마을을 거쳐 석교마을에 이르는 매우 긴 항로였다. 그러나 이들 마을을 매일 모두 지났던 것은 아니고, 마산에서 출발하여 안골과 귀곡, 용호, 석교로 이어지는 길이 정기 항로였다.

그 외 마을의 포도 출하시나, 굴을 팔러 갈 때, 5일마다 서는 어시장을 갈 때 등과 같이 주민들의 요구가 있을 때 운항하는 비정기 항로도 있었다. 현재 석교마을에서 똘똘개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홍태식 씨의 경우, 직접 웅남호를 타고 매일 마산에 있는 학교로 통학을 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나 여름과 가을철 태풍 경보가 울리면 배가 운항되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웅남호는 당시만 해도 상당히 큰 목선이었으나, 배의 형태가 포도 등을 주로 싣고 다닐 목적으로 만들어져서 일반 배와는 사뭇 달랐다. 대개 노 젓는 배들이 선두가 ㅅ자(字) 형태를 취하고 있는 유선형인 반면 웅남호는 선두는 약간 뾰족하지만 짐 등을 실어야 했기 때문에 그 다음 칸부터는 넓었다.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제일 앞은 짐칸, 다음 칸은 여자들이 타는 칸(양옆으로 출입문이 있었다) 다음은 엔진실, 마지막 칸은 남자들이 타는 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 제일 끝 선미 부분에는 당시 껄렁한 학생들이 주로 차지하는 자리였다고 홍태식 씨는 기억하고 있다.

웅남호가 언제까지 운항되었는지는 마을 사람들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대략 1978년까지는 운항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현대양행 직원들이 이 배를 타고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마산으로 회식을 가거나 술자리가 있을 때는 이 배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육로가 개설되면서 웅남호는 차츰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웅남호 외에도 당시에는 ‘뗏마’라 하여 노 젓는 배들이 15척 정도 있었는데, 이 배들은 웅남호를 대신하는 배들이었다. 이 배들은 주로 포도를 싣고 다니거나, 낚시꾼들을 태우는 배들로 개인이 운영하는 비허가 배들이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배 이름으로 욱진호 등이 있었다.

이종현 씨는 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몇 년까지는 똥배 2척이 운항하기도 했다고 들려준다. 주로 마을에서는 이 배로 신마산에서 인분을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똥배의 구조는 배의 앞자리에는 똥장군을 싣기 위해 비어 있고, 뒤에는 노를 젓고 몇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똥장군을 배에 두고 인분을 집집마다 돌면서 구입해 다시 배에 실어서 가득 채워지면 마을로 돌아와 밭이나 논에 미리 파둔 인분 구덩이에 채웠다는 것이다. 인분 한 통을 뿌려 봤자 몇 줄 뿌릴 수 없어 물을 타서 섞어 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또 삼귀에는 당시 방앗간도 없어서 마산 가포 본동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노를 젓는 배를 타고 탈곡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데만도 꼬박 하루일이었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홍태식(남, 1955년생, 석교마을 거주)

황은준(남, 1933년생, 석교마을 거주)

이두봉(남, 1930년생, 석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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