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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남 할머니의 인생역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A030104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귀산동 석교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정헌

석교마을 603번지 는 조개를 캐서 한평생 생계를 이어 온 이말남(71세)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이말남 할머니는 한평생을 바다 일로 고생만 하다 이제는 몸이 성치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젊어서 한 고생 때문에 골병이 들어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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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밭에서 작업하는 마을 사람

이말남 할머니가 태어난 곳은 일본군의 탄약창 건설로 부득이 모든 마을 사람이이 이주를 해야 했던 진해 비봉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만 하더라도 비봉마을은 엄청 큰 마을이었고, 이웃의 동섬에서도 20여 가구 정도가 터를 잡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마을은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강제 철거되어, 마을 사람들은 각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말남 할머니는 비봉마을에서 19세에 마을 어른의 중매로 남편인 황은준(76세)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남편 황은준 옹은 원래 거제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에 집안이 석교마을로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온갖 힘든 일을 겪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남편인 황은준 옹이 사철 없이 화목이며 ‘깔비’(이 마을에서는 떨어진 솔잎을 이렇게 부른다)며 알차리(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해다가 배를 타고 마산 어시장 등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40~50년 전만 해도 깔비 한 동에 30~40원 정도를 받아 힘들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인 이말남 할머니가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서 생계에 보태야 목숨이나마 연명할 수 있었다고. 이 마을 부녀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조개를 캐서는 객선을 타고 마산 어시장 상인들에게 내다 팔아 다른 생필품을 구입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침 6시 첫배(당시만 하더라도 시간마다 배가 있었다)를 타고 전날 캔 조개를 내다 팔았는데, 당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말하기 싫을 정도로 몸서리가 쳐진다고. 조개도 늘 캘 수 없었는데, 마을 앞 바닷가에서 나는 조개는 모두 주인이 있어서 마을 인근에 있는 주인 없는 해군 땅(진해기지사령부 소유를 이렇게 부른다)에 몰래 가서 캐오는 것이 일상화되었단다.

밤낮으로 지키는 군인들과 조개 소쿠리를 안고 쫓고 쫓기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삶이 절박한 마을 사람들은 이곳 조개를 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군인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산이고 바다고 도망을 쳐야 했는데, 만약 그들에게 붙잡히면 무시무시한 보안대에 끌려가 고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돈으로 2,000원 정도의 벌금을 물거나 형편이 안 되면 영창을 살아야 했기에 군인들이 쫓아오면 물속이든 풀숲이든 그들이 갈 때까지 숨어 있기 일쑤였다. 한겨울 차가운 바닷물 속에 몇 시간이고 숨을 죽이고 있는 일은 다반사였고, 물속에 목만 남겨 놓고 몇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조개를 캘 수 있는 날이면 민간인 출입 통제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때 고생으로 병을 얻어 지금은 손마디며 관절이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당시 마을 부녀자들은 5명이고 10명이고 무리를 지어 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어렵게 조개를 캐서는, 새벽에 일어나 진해로 통하는 세로(細路)를 따라 진해 탑산 밑에 있는 진해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침밥은 상상도 못할 시기라 조개를 판 돈으로 요기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국수 1다발을 바꿔서 오곤 했다는 것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래도 배를 채워야 했기에 몇 사발이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허기를 면하곤 했다고.

그런데 조개는 캐야 하고 어린 자식은 집에 두고 올 수 없어 부득이 아이를 들쳐 업고 온 부인들의 고생은 더 막심했다고. 바다에 들어가서 철조망을 넘어야 하고, 혹시 아기가 울거나 보채면 군인들에게 발각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때의 초조한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간혹 맘씨 착한 군인들도 있기는 했단다. “하기사 보초 서는 군인들도 무슨 죄가 있었겠노? 자기 땅에 들어오지 말라고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제.” 하고 이말남 할머니는 허허롭게 웃고 만다.

당시 조개 값이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자, 50년 전에는 1되에 10원도 받고 15원도 받았는데 1970년경에는 30원 정도를 받았고, 1980년도에는 100~150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 시세를 물어 보자 5000원 정도를 받는데, 요즘은 조개가 거의 없어 하루에 1되를 캐기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또 조개를 팔고 무엇을 구입했는지 물어 보자, 보리쌀과 국수가 대부분이었지만 옥수수 가루도 구입했었다고 한다. 옥수수 가루는 정부에서 극빈자들에게 배급품으로 나눠 주는 것이었으나, 그들이 다시 이것을 시장에 내다팔아 구입할 수 있었단다.

그러면서 이말남 할머니는, 한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너무 고생해서 남은 것은 무릎과 손 마디 마디의 관절염이라고 하신다. 손발이 떨리는 병은 10년 전부터 얻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별 차도가 없단다. 밤에는 너무나 통증이 심해 잠을 이루지도 못한다고. 이 날 인터뷰 도중에도 손발은 물론이고 입술까지 떨고 있는 모습이 한평생 고생으로만 이어 온 삶의 고단함이 느껴져 가슴 한 구석이 아려 왔다.

[정보제공자]

이말남(여, 1938년생, 석교마을 거주)

황은준(남, 1933년생, 석교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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