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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을 들고 매일같이 경비 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D010304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은실

낙동강 제방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모산마을은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범람하여 몇 차례 물난리를 겪었다.

마을 최대의 물난리는 1934년 7월로, 마을 사람들은 그때를 ‘갑술년 물난리’라 부른다. 엄청난 양의 장맛비가 쏟아져 강물이 마을을 덮쳤고, 마을 사람들은 만당[일명 만등]에 올라가 간신히 몸만 피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1963년과 1965년, 1969년 폭우가 내려 한 해의 농사를 망치기도 했었고, 강물에 떠밀려 마을 사람들이 익사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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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방과 모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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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동읍, 대산면 일대 수해로 인한 식량보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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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폭우로 인한 대산면 일대 침수 광경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장마 기간만이라도 마을을 보호하고자 ‘야간경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야간경비대는 청년회가 주관하여 해가 지는 시각부터 다음날 해가 떠오를 때까지 경비를 섰다. 경비를 서는 방법은 이러하다. 그날 참석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서 조를 편성한다. 이러한 조는 보통 3개로 편성되었는데, 1개의 조에 5명 내지 7명이 배치되어 둑을 순찰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야간경비를 섰던 문학봉 옹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1960년대에 비가 많이 내려 하천 둑에 가보면 삼분의 일 가량 물이 차 있어. 동네 청년들이 횃불과 징을 들고 다니면서 둑에 경비를 매일같이 서다시피 했지. 횃불은 철사에다 소개로 돌돌 말아 감아서 만들어. 이걸 기름을 담가 놓으면 불이 많이 올라오지. 기름이 다 타고 나면 새로 담가야 하고. 기름통을 한 군데 지정 장소가 있거든. 간식도 그 자리에서 먹고. 가령 동네 청년들이 징을 치면 모두 만등으로 대피하라는 거고. 징은 범람의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였고.”

또한 낙동강 둑 경비는 모산마을 사람들만 서는 게 아니었다. 낙동강 둑 인근 마을의 청년들 또한 야간경비를 섰다. 나름의 경비구역이 정해져 있었는데, 자신들의 마을과 가까운 다리와 건물을 기준으로 구역을 분담하여 경비하는 것이었다.

수산대교에서 북부양수장 앞까지 한 바퀴를 도는 거예요. 동네 복판을 본부로 삼아 돌아다녔지. 요게 이장(김형두 씨) 집 뒤, 여기 우리 모산에서 제일 큰 길이거든. 구르마길 그게 제일 큰길이라. 항시 사람들의 집결 장소였지. 지금 같으면 본부지. 1조가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오면, 2조가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오고, 다음 3조가 나가고. 조당 한 바퀴 도는 데는 1시간. 공평하게 하루 저녁에 한 조당 서너 번 정도 돌고.”(문학봉, 남, 78세)

모산마을의 경비구역은 수산대교의 동쪽 편에서 북부양수장 앞까지였다.

그것은 수산대교와 북부양수장 한가운데에 모산마을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9년 건립한 수산교가 붕괴의 위험이 있어 1995년에 건립된 것이 수산대교로 밀양과 창원을 잇는 다리인데, 마을과는 동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수산대교 서쪽에는 대산면 갈전마을과 일동마을 사람들이, 동쪽에는 모산마을 사람들이 경비를 섰다. 또한 모산마을과 북부양수장은 300m 떨어져 있는데 북부양수장 서쪽은 모산마을이, 동쪽은 북부마을이 경비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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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대교와 낙동강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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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들에서 바라본 북면양수장의 모습

“밤새도록 잠 안 자고 물이 줄어들 때까지 경비를 섰지. 둑이 터지면 큰일 나잖아. 낮에는 경비를 안 서고, 밤에만 섰어. 밤이 제일 겁나거든. 밤에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낮에는 사람들이 전부 하천에 나와 있어. 물이 어떻게 되었나 싶어서 구경 나오지. 경비를 안 서도 매한가지. 해가 떨어지면 누구 할 것 없이 경비를 서로 나와. 해가 떨어지면 경비를 서고, 해가 올라오면 그만 서고.

동네 사람들은 밤새도록 둑을 순찰하는 마을 청년들에게 고생한다며 집집마다 간식을 주곤 했지. 동네 이장네가 욕본다며 종종 간식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끼리 라면을 끊여서 먹고. 물이 많이 들면 참, 집에 안식구가 잠을 자질 못해. 남편 걱정이지. 강물이 덮칠까 두렵기도 하고 겁이 나서 자질 못해.”(문학봉, 남, 78세)

모산마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더 이상 낙동강 둑을 순찰하지 않게 되었다. 장마철이 다가오는 5월에는 수박을 수확하느라 모두 바쁘기 때문이다. 북모산마을 이장인 김형두 씨는 이렇게 말한다. 강물이 범람할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 위험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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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물에서 건져낸 수박

[정보제공자]

문학봉(남, 1931년생, 북모산마을 거주, 북모산마을 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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