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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에 짚신 삼는 거를 배웠는기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D030101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황은실

북모산마을 노인회장 문학봉(78세) 옹과 인터뷰를 하던 중, 문학봉 옹이 마을에 손재주가 많은 분이 있는데 그분의 생애를 담아 봄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얼마 후 문학봉 옹은 정차종 할아버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경로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정차종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차종 할아버지는 모산마을을 넘어 대산면에서도 ‘바지게 만드는 할아버지’로 유명하다. 바지게 만드는 할아버지라는 단순한 별칭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이름 뒤에는 “대단하신 분이다. 배울 게 많은 분이다. 늘 남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라는 말이 따라왔다. 바지게 만드는 일과 존경 받는 일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노인회장님이 전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로당 마당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들어왔다. 첫 대면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오토바이인 일명 ‘스쿠터’라고 생각했는데 반질반질 윤이 나는 125cc의 오토바이를 타고 오신 게 아닌가. 헬멧을 벗지 않으면 그가 여든한 살의 노인임을 아무도 모르리라.

정차종 할아버지는 아주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귀가 조금 어둡다고 한다. 생활하는 데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생애를 담는 일이 조심스러워 방에 들어오자마자 정중히 의중을 여쭈어 보았는데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러고는 차분히 어릴 적 추억을 더듬어 가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정차종 할아버지는 1928년 창원시 동읍 본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 형과 함께 힘겹게 일제강점기를 보내야 했다. 당시는 일제의 무력 탄압과 민족말살정책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배워서인지 지금도 일본어로 유창하게 말하였다. 할아버지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일정 때 공부를 했는데 일본 거(말)를 배웠는 기라. 바가고라(?)…… 사요나라. 그때는 조선말 하다가 선생한테 들키면 귀티(따귀) 맞고, 일본글 조금 배우니 열여섯 살 넘어 (학교를) 막실했는(마쳤는)기라.”

그 당시(일제강점기)는 양말도 없었던 시절이라 신발은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었다. 신발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짚신이라도 있으면 신고 다녔을 텐데 짚신 삼는 법을 몰라 겨울에도 동상 걸릴 위험이 있는 줄 모르고 마냥 맨발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열여섯 살이 되는 무렵에 마을의 머슴들로부터 짚신 삼는 것을 배웠다. 당시 저녁 무렵이면 머슴들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서 짚신을 삼았다.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머슴방에 들어가 머슴들이 짚신 삼는 것을 눈여겨보고 따라해 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짚신 삼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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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으로 만든 축구화

“열여섯 살 때부터 일해 먹었어. 학교 막실하고(마치고) 손수 머슴방 가서 짚신 삼는 거 배웠는기라. 머슴방에 가야 가르쳐 주거든. 내가 솜씨가 좋아 고래 배워 가지고 망태, 바지게, 도리깨도 만들고, 우리 형님이 있지만은 일 안하는 기라. 우리 형님이 신체 크고 발이 큰데 내거는 발이 작어서 빨리 삼지만은 우리 형님 거 삼아 줄려면 발이 커서 한참 삼았어.”

[정보제공자]

정차종(남, 1928년생, 북모산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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