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일보
-
1920년대 있던 마산부 지역 신문 기자 단체. 1920년 일제가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문화 통치’를 채택하면서 일제의 허락 하에 『조선 일보』·『동아 일보』 등 신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에 지역 주재 기자들을 중심으로 경남 기자 동맹이 형성되었고, 곧이어 하부 조직으로 지역 단위의 기자단이 형성되었다. 마산 기자단이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출신의 시인이자 평론가. 권환(權煥)[1903~1954]은 1921년 중동 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신소년』에 「아버지」를 발표하였다. 일본 야마가다[山形] 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교토[京都] 제국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사상운동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생 기관지인 『학조...
-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기자. 김일규(金一奎)[1922~1981]는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1948년 『자유 민보』 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경남 신문의 경남 매일의 보도 기록 사진작가를 지냈다. 특히 3·15 의거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만천하에 알렸다. 그 밖에 근현대 마산의 정치, 경제·사회,...
-
1946년 3월 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 지역에서 발간된 지방 신문. 경상남도 지역 신문의 시초는 1909년 8월 19일 창간된 『경남 일보』이다. 2010년 7월 옛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 등 3개시가 통합한 창원시 지역 내에서는 1946년 3월 1일 창간된 『남선 신문』이 최초의 지방 신문이다. 『남선 신문』은 해방 후 마산에 1945년 12월 『동아...
-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1910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무단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은 수탈과 착취 아래 놓였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다.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 운동·문화 운동·3·1 만세 운동·농민·노동 운동...
-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일제 강점기 초등 교육 기관 기능을 수행한 비정규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야학은 크게 농민 야학·노동 야학·여성 야학으로 나눌 수 있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자강 운동 등의 일환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야학은 일제 강점기 거의 전 계층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던 대중 운동이었으며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빠른...
-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연속 촬영한 필름을 연속으로 스크린에 비추어 물건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보이는 영상.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 진해의 통합 창원시 출범에 따라 영화의 역사를 3개시 통합하여 개괄한다. 영화의 광범위한 보급은 전기의 공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에는 발전기 등을 이용하여 영사기를 가동했겠지만 대형 스크린에서 장편의 영화...
-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시인은 아버지 김규석(金圭奭), 어머니 조용락(趙鏞樂) 사이에서 1907년 2월 4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동[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야은(野隱)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항일 민족 기독교 학교인 계광 보통학교에 들어가 13세인 1920년에 졸업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앓게...
-
창원 출신 시인·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강상 유인(江上遊人), 노산 학인(鷺山學人).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이다.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1918년 아버지 이승규가 세운 마산 창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1923년 이후 창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1925...
-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창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시기. 1. 마산 1914년 3월 1일 부·군제의 실시와 함께 창원부 외서면 마산포 일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당시 마산포의 인구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하여 부(府)의 기준에 미달하였다. 그러나 마산항의 병참 기지로서의 중요성과 대일 교역상의 입지적 특성이 중시되어 부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