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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32
한자 三別抄
영어의미역 Three Elite Patrol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71년 3월~1273년 - 삼별초의 항쟁 시작|종료
성격 대몽 항쟁
관련 인물/단체 삼별초

[정의]

1270~1273년 경상남도 창원 지역을 포함한 남해 연안에서 대몽 항전을 주도한 세력.

[개설]

삼별초는 고려 시대에 경찰 및 전투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이름으로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합쳐 부른 말이다. 삼별초는 몽골의 고려 침입 직전인 1230년(고종 17) 무렵 무인 집정 최우(崔瑀)에 의해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좌별초·우별초로 나뉘게 되고, 여기에 몽골로부터 돌아온 군사를 중심으로 신의군이 구성되면서 이들을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1232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으며, 강화도를 근거지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려 경별초(京別抄)로 불리기도 하였다. 무인 정권이 붕괴된 뒤 고려의 몽골에 대한 항복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개성 정부와 몽골[원]에 대항하여 3년 동안 싸웠으나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하였다. 당시 삼별초의 대몽 항전 활동에는 다수의 민인들이 동참하였고, 현재의 창원 지역도 몽골과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하였던 전장 가운데 하나였다.

[발단]

몽골과 강화한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오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삼별초 해산에 대한 반발과 함께 1270년(원종 11) 배중손(裵仲孫)을 지도자로 하여 반몽(反蒙)을 기치로 봉기하였다.

[경과]

초기에는 삼별초를 해산하려 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드는 형태였으나 곧 이어 ‘반몽’을 기치로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까지 구성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동조 세력들이 가세하게 됨으로써 점차 본격적인 반몽 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주로 진도·남해·제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몽 항전을 주도하였다. 진도 정부는 남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별도의 수군을 운용하면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남해에서 이들을 이끌었던 지휘관은 유존혁(劉存奕) 장군이었으며,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현재의 창원 지역을 포함한 남해 연안 지역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창원 지역은 1271년(원종 12) 3월 이후부터 1273년까지 감무(監務)가 붙잡혀가고 전함이 불태워지는 등 집중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는 창원을 포함한 금주(金州) 관할의 지역들이 여몽 연합군이 주둔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남해의 삼별초 세력은 일본과의 교섭도 적극 전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고려 첩장 불심 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이다.

[결과]

삼별초의 항쟁은 여몽 연합군에 의한 진도 정부의 붕괴에 이어 마지막 배후 기지인 제주 마저 공함되면서 최종적인 목표 달성에 실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창원 지역은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기지로 개편되어 많은 인적·물적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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