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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22
한자 -馬山-燒酒-淸酒-濁酒-맥주)-그리고간臟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종수

[술과 꽃의 도시 마산의 술]

마산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주조(酒槽) 양조업으로 유명했는데, 1937년 마산부에서 만든 관광 홍보용 리플렛 ‘관광 마산’의 표지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마산을 둘러싸고 있는 무학산과 벚꽃, 마산 앞바다, 돝섬, 마산만의 배들이 그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마산에서 거주했으며 『마산 항지(馬山港誌)』[1926]를 저술한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당시의 마산의 술과 꽃을 노래하였다.

花の馬山か 馬山の花か / 秋は冱えたる 月の浦[꽃의 마산이냐 마산의 꽃이냐/ 가을 깊어가는 달의 포구]

酒の馬山か 馬山の酒か / 花もさけさけ 水はこんこん[술의 마산이냐 마산의 술이냐/ 꽃도 술술 피어나고 물은 용솟음치네]

[번역 : 경남 대학교 배대화 교수]

이제는 ‘무학 소주’와 ‘하이트 맥주’로 유명한 마산이 되었지만, 개항 이후 해방까지 마산의 술은 청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술과 더불어 마산을 대표했던 마산의 왜간장]

일제 강점기 이래 마산이 주도(酒都)라 불릴 정도로 주조 양조업이 발달했던 것은 원료인 물·쌀과 기후가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유 양조업에도 동일한 것이어서 마산의 양조간장 산업은 주조 산업과 함께 마산을 대표하는 제조업이었다. 마산에서 생산된 간장은 개량식 간장이다. 집집마다 담그던 재래식 간장을 조선간장, 개량식 간장을 왜간장이라 불렀는데 마산의 장유공장에서 생산한 것은 그 왜간장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메주로 만드는 재래식 간장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이 왜간장을 그냥 간장이라는 보통 명사로 부를 정도로 재래식 간장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인 불고기에 쓰이는 간장도 왜간장으로 불리던 개량식 간장이다.

[마산의 청주]

마산 최초의 청주 양조장은 개항 5년 후인 1904년 일본 거류민 아즈마[東忠勇]에 의해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마산의 대표 산업에서 국내 청주 업계의 으뜸으로 성장, 마산이 ‘주도(酒都) 마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청주 양조의 세 가지 필수조건, 수질·쌀·기후가 최적이기 때문이다.

1920년 마산의 청주 생산량은 13개 양조장에서 4,400석이 생산되었는데, 부산의 6,300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는 12개 양조장에서 1만 1000석을 생산하여 부산의 생산량 1만 석을 추월, 조선 최고가 되었고 1938년에는 2만 석을 생산하였다. 1929년에 대형 종합 주류 생산 업체인 소화(昭和) 주류가 설립되었다. 이때 마산의 청주는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청주에도 조선 총독부의 전시 통제령에 의해 배정받은 원료에 따라 한정 생산 판매되었는데,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구분되었고, ‘이연주(理硏酒)’라는 합성주 생산이 장려되었다. 1940년 현재 마산에는 13개의 청주 양조장이 있었는데 대표 양조장으로는 시미즈[淸水] 양조장, 하다라[原田] 주조장, 니사다[西田] 주조장, 히라이[平井] 주조장이 있었다.

해방 이후 일인 경영 ’청주 양조장 13개가 귀속·불하되어 1946년 세무 당국으로부터 주류 제조 면허를 받아 생산에 들어갔는데, 삼성(三星)·염록(艶綠)·금포(金浦)·대흥(大興)·칠성(七星) 등이다. 해방 후 식량난과 원료인 쌀 사용 제한으로 경영난을 겪었다.

6·25 전쟁 이후 마산의 청주 업계는 서울 출고분에 한해 ‘명화(銘花)’라는 통일 상표를 사용, 공판제를 실시하였는데 갈등으로 인해 1년을 넘기지 못해 해체되었다. 가열 경쟁으로 인한 저질주 생산과 덤핑 판매로 청주 업계가 침체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위축되어 오던 마산의 청주 업계는 1961년 백광(百洸)·녹수(綠水)·조해(朝海)·삼광(三光)·삼강(三江)·대흥(大興)·삼일(三一) 등 7개 양조장이 있었는데, 곧 이어 5개가 폐업하고 백광과 삼광만 조업을 계속했다. 이후 1962년 한목단(寒牧丹), 1965년 성광(星光), 1969년 신광(新光)이 창업, 1970년 현재 5개소의 청주 업체가 있었다. 생산량은 1963년과 1964년에는 1,700~1,800㎘, 1967년 이후 약간 증가하여 연 3,500㎘ 정도를 유지했다.

1970년대의 마산의 청주 업계는 소주와 맥주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71년 현재 백광·삼광·신광을 비롯한 5개의 청주 회사가 있었으나, 1973년 군소 주조 업체 통합 조치로 백광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71년 청주 86만 2100ℓ, 합성 청주 17만 1790ℓ 생산에서 1974년에는 청주 71만 6470ℓ, 합성 청주 29만 4789ℓ를 생산하였다. 1970년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 일제 때부터 마산을 대표하던 술인 청주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마산의 소주]

해방 이후 적산이었던 조선 중앙 소주는 마산 중앙 소주, 소화(昭和) 주류동양 주류 주식회사, 야마무라[山邑] 주조는 무학 주조로 바뀌어 1951년 이후 불하 받은 한국인이 운영하였다. 쌀을 원료로 하는 청주·탁주와 달리 마른 고구마를 원료로 한 소주는 해방 후 식량난 속에서도 무난히 조업할 수 있었다. 1952년 동양 주류동양 주정 공업 주식회사로 바뀌어 국내 최초로 수입 당밀을 원료로 한 주정을 생산하였다. 1960년 유원 산업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무학 주조도 1952년 당밀을 원료로 주정 생산에 성공하였고, 1953년 무학 주정 공업 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후 생산 시설을 크게 확충, 월평균 약 2,000석의 생산 능력을 갖추었다. 1961년 현재 마산의 4개 소주 공장에서 월평균 6만 석의 소주를 생산하였다. 마산 양조 공업사와 강남 소주 회사에서는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했고, 유원 산업과 무학 주정은 주정과 소주를 생산했다.

소주 수요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마산의 소주 업체는 무학·강남·백광·삼천리·영진 등 5개 업체로 재편되었는데, 유원은 소주 생산을 중단하고 주정만 생산하였다. 마산의 소주 업체에서는 1960년대 전반기까지 연평균 5,000㎘ 내외를 생산하였으나 1967년 이후 수요 증가로 연평균 1만 3000㎘을 상회하여 생산하게 되었다.

1971년 10월 정부의 주류 업체 통합 조치로 무학 양조장이 경남 일원의 35개 군소 소주 공장을 통폐합하여 무학 주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남의 소주 생산을 독점하였다. 1971년 증류식 소주 25만ℓ, 희석식 2066만ℓ에서 1972년 증류식 14만여ℓ, 희석식 1677만 8000여ℓ로 줄었으나, 1975년 이후 수요 증가로 생산량도 계속 증가하였다.

1980년대 마산의 소주 산업은 무학 주조 주식회사 독점 체제로 재편되어 1984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 공장을 신축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무학 소주는 해외 시장 개척에도 나서 1985년 일본 도큐에 소주 2만 4000본[미화 1만 5120달러]을 수출하였다.

1990년대 무학 주조 주식회사는 관광 소주 등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면서 1980년대 말의 연간 생산량 6만 8000드럼, 1989년 총매출 279억 원을 기준으로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연평균 10~15%의 증가세를 보여 1994년 매출액은 431억 원에 달했고, 이중 해외 수출액이 2억 5346만 원이었다. 1995년 매출액은 391억 원으로 이중 수출액은 2억 5000만 원이었다.

2000년대 이후 무학 주조 주식회사는 오랜 연구 끝에 국내 최초로 저가 소주 ‘좋은데이’를 개발했는데, 인기를 얻어 저가 소주 붐을 일으키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마산의 탁주]

탁주·약주는 우리나라의 국주(國酒)로 농주·막걸리라고도 하는데 일반 민가에서 독자적으로 만들던 술이다.

1928년 조선 총독부에서는 개인 양조를 금하고 허가받은 자만이 양조를 할 수 있게 하여 탁주 양조장이 생기게 되었다. 1928년 허가제 실시 직후 마산의 탁주·약주 업계 생산량은 1,500석 정도였으나, 그 후 생산량이 증가하여 1938년에는 약 5만 석을 생산하였다.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 회사와 달리 탁주 업계는 주로 조선인이 경영했고 규모도 영세했다.

적산이었던 청주 양조장과 달리 탁주 양조장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 중 유일한 적산이었던 가나오 주조장은 불하되어 선일(鮮一) 주조장으로 바뀌었다. 경영권은 유지되었으나 해방 공간과 6·25 전쟁 동안 주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어 술의 맛이 저하되어 소비가 감소되어 침체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상반기의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연간 4,000~5,000㎘ 내외였으나 하반기에는 소비가 증가되어 1967년 이후 연간 7,000㎘를 생산 판매하였다.

1969년까지 1,000ℓ를 넘지 못했던 탁주 생산량은 1970년대 들면서 증가하여 1971년 1152만 2640ℓ, 1973년 1513만 2696ℓ, 1974년 3021만 7337ℓ라는 생산기록을 세웠다. 1975년 이후에는 소비자의 기호가 소주와 맥주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연평균 생산량은 1300만~1400만ℓ에 정체하였다.

1980년대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1981년 1만 6464㎘ 고비로 1983년 이후에는 연평균 생산량이 1만 1200㎘로 감소되었다.

마산의 군소 양조장이 통합되어 설립한 마산 공동 탁주의 연간 생산량 추이는 1980년대까지는 1만㎘를 웃도는 수준을 유지해왔으나, 1990년대에 접어들어 1991년 7,217㎘, 1992년 5,363㎘, 1993년 3,812㎘, 1994년 3,596㎘, 1995년 2,865㎘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기부터 탁주 양조 기술의 발전으로 신선 유통이 가능하게 되고, 발효 식품인 탁주가 건강에 좋다는 게 알려지면서 다시 안정적 수요를 회복하고 있다.

[마산의 맥주]

마산과 맥주의 본격적인 인연은 1970년대 후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978년 1월 서울의 조선 맥주 주식회사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소재의 한독 맥주 마산 공장을 인수해 조선 맥주 마산 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맥주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조선 맥주[상표명 ‘크라운’]는 합성동의 대지 15만 909㎡, 건평 4만 8430㎡의 공장에 연 2,000만C/S[1C/S는 500㎖×20본]의 생산 시설을 갖추었다.

1981년 1187만 6000여 C/S, 1983년 1394만 7000여 C/S, 1984년 1576만 5000 C/S로 성장하였고, 1985년 이후 연평균 1700만C/S의 생산 수준을 유지했다. 1994년 9월 1일 출시한 비열 처리 맥주 ‘하이트 맥주’가 빅히트를 하면서 1994년 연간 생산량이 2059만 2861C/S로 2000만C/S를 넘어섰고, 1995년에는 2850만 8700여 C/S를 생산하였다. 이후 맥주 단일 품목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맥주 브랜드인 ‘OB맥주’를 넘어서기도 했다. 사명도 ‘크라운 맥주’에서 ‘하이트 맥주’로 바꾸어 안정적 성장을 하고 있다.

[물 좋은 마산의 양조간장]

일제 강점기 이래 마산이 주도(酒都)라 불릴 정도로 주조 산업이 발달했던 것은 원료인 물·쌀과 기후가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인데, 이는 장유 양조 산업에도 동일한 것이어서 마산의 양조간장 산업은 주조 산업과 함께 마산을 대표하는 제조업이었다.

마산에서 생산된 간장은 개량식 간장[양조간장은 재래식 간장과 개량식 간장으로 나누는데, 재래식 간장은 콩으로 만든 메주에 소금물을 붓고 삭혀 간장과 된장을 만든다. 개량식 간장은 콩에 볶은 밀을 넣은 개량 메주로 만드는데, 대량 생산을 할 경우는 콩 대신 탈지 대두에 종국을 섞어 사용한다. 개량식 간장은 부산물인 된장이 나오지 않으며 아미노산·맥아당·포도당·알코올·젖산 등이 들어 있어 영양분이 풍부하다. 여러 가지 무침이나 국·생선회를 찍어 먹는 소스로 쓴다]으로 집집마다 담그던 재래식 간장을 조선간장, 개량식 간장을 왜간장이라 불렀는데 그 왜간장이다.

마산의 장유 양조업은 개항 이후 마산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수입해 먹던 간장을 직접 제조하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일본인들만 먹었는데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맞아 수요가 확대되어 경남 일원은 물론 원산이나 청진까지 판매되었다.

해방 이후 적산으로 분류되었던 장유 공장은 한국인 연고자에게 불하되었다. 아까몽[赤門] 장유는 김창석이 인수하여 해광 장유와 해양 장유라는 2개의 공장으로 운영하였고, 후꾸이 장유는 김은업이 인수하여 평화 장유로, 대형 군소용 장유 회사였던 조선 마루깅[丸金] 장유는 6·25 전쟁 이후 심상준이 인수하여 한국 환금 장유[수]로 운영하였다. 현재의 몽고 간장을 생산하는 몽고 종합 식품의 전신은 김홍구가 인수했던 야마다[山田] 장유이다. 해방과 6·25 전쟁 후 한국인이 인수해 운영했던 장유 공장은 기술 미숙과 자금 악화로 어려움을 겪어 일부는 문을 닫았다. 휴전 이후 소규모 공장들이 생겨나 1961년 현재 불로 식품 주식회사, 몽고 장유, 미광 장유, 마산 산업 주식회사, 환금 장유 주식회사, 삼성 장유, 문화 장유 등 일곱 개가 되었다. 연간 총생산량은 간장 1만 섬 내외, 된장 2만 2500㎏이었으나 업자 간의 경쟁 과열로 덤핑 판매와 저질품 유통으로 수요자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1970년 현재 마산의 장유 업체는 동양 장유·몽고 장유·문화 장유·미광(味光) 장유·미연(味延) 장유·백광(白洸) 장유·삼성 장유로 재편되어 경쟁했으나, 1980년에는 몽고 장유와 문화 장유 두 개로 정리되었다. 이어서 문화 장유 마저 폐업하고, 몽고 장유만 남게 되었다.

1980년대 마산의 장유 산업은 몽고 장유 독점 체제로 유지되었는데, 1985년 3월에는 미국 시장에 간장을 수출하여 국제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1987년에는 자본금 3억 원의 법인을 설립, 몽고 식품 주식회사[대표 김만식]가 되었다. 1988년 3월 차룡 단지[현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내에 대지 1만 9835㎡, 연건평 7,107㎡의 현대식 공장을 세워 연간 3만㎘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공장을 이전하였다. 1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는 마산을 대표하는 향토 산업인 몽고 장유의 뿌리를 버리지 않고 이전 이전의 본사인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119에는 마산 영업소로 유지하고 있다. 1988년부터는 식초·고추장 등도 생산 공급하는 종합 식품 회사의 면모를 갖추었고 해외 수출도 꾸준히 신장하였다. 이에 국내외 유통을 담당하는 몽고 유통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2005년 11월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몽고 간장 100년사』를 간행하였다. 2005년 현재 몽고 간장의 전국 시장 점유율은 30%로 80여 개 장유 업체 중 2위이며, 1985년 미주 지역을 시작으로 36개국에 연간 100만 달러를 수출해 수출 실적에서는 1위를 고수하고 있다.

1957년 제1회 전국 양조 식품 전시회 최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1961년 필리핀 국제 박람회에는 장유 부문 한국 대표로 단독 출품했으며, 1990년 국제 유럽 품평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유럽 어워드’상을 수상했고, 2002년 국제 식음료 품평회에서는 ‘뉴 밀레니엄 어워드’상을 받았다. 명예 공장장 강암석[82세]을 비롯해 전체 직원의 90% 이상이 20년 이상 장기 근속자들로, 몽고 간장은 장유 기업의 브랜드이면서 마산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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