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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 창원의 고대 축제! 성신 대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41
한자 海上安全-豊漁-祈願-昌原-古代祝祭-星神大祭
이칭/별칭 별신 대제,성숙 대제,사당 할배 제사,성숙 대장 제사,성신 장군 제사,별신 장군 제사,비신 장군제,배신 장군님 제사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노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0년 - 경상좌도 우조창인 마산창이 설치되고, 조창 유정당이 낙성되어 조운선 출항에 맞추어 축제 지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2년 - 『창원부 읍지』에서 조창의 축제와 뱃길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9년 - 조창의 폐지와 마산포의 개항으로 조창의 인적 문화적 자원이 마산포로 이전됨, 공적 축제의 소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 마산에 대폭풍우의 피해가 일어나자 어시장에 신당을 세우고 제의를 부흥시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 마산 어선창 합포사[객주]에서 별신(聖神)대제 거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4년 - 어업 조합 또는 마산 수협 조합 중심 축제, 유교식으로 제의 형식이 정비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 수산물도매센터 옥상에 현대식 제당을 설치하여 성신위 모심
제당 산제당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호서7길 32-16[추산동 49-105]지도보기
제당 성신 사당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수산1길 192[오동동 311-1]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거행하는 해상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고대 축제.

[성신 대제의 발생과 변화]

1. 조창의 설치와 성신 대제

성신 대제는 포(浦)를 거점으로 설치된 조창과 관련된 민속 신앙이다. 조창은 1663년(현종 4) 산호리의 석두창에서 오산진(午山津) 구역으로 옮겨갔다. 오산진조창은 갈대밭에 설치된 노적창이었다. 이 조창은 1760년(영조 36)에 창고 시설을 온전히 갖추게 된다. 마산창 유정당에서 조운선이 출발하는 때를 맞아 경상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축제가 열렸다. 김이건의 「송조선가(送漕船歌)」와 박사해의 「조창 유정당(漕倉 惟正堂)」 시가 전하며, 조덕상의 「유정당기(惟正堂記)」가 있다. 이는 당시 조창에서 조운선의 안전 항해와 주민의 안녕을 위한 제사와 뱃사람을 위로하는 축제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마산포조창을 근거로 발달된 도시이기 때문에 자연히 뱃길 안전은 주민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이 신앙은 주민들의 공동제로 유지되었다.

『중외 일보』 1928년 5월 22일 기사에 “마산에서 조선인의 경제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을 밟고 있는 어선창 합포사에서는 지난 17일 오전 10시경에 별신(星神) 대제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그 제(祭)는 거금(距今) 약 200년 전 마산이 합포라는 이름으로 일소(一小) 어촌에 불과할 때부터 어상들이 수호하여 오는 습속이라는 바, 그 습속이 점차 쇠멸하여 유야무야한 가운데 있었던 것을 그 연고자들은 유감으로 생각하고 25년 전, 즉 갑진년에 이를 부흥시키어 5년과 10년에 나누어 중제·대제를 행한다는데, 금회가 마치 10년 대제인 만큼 어상들의 총출동으로 성신 대제는 성대히 또 원만히 마치었다더라.”라 했다. 이는 성신 대제의 생성 기반과 변화 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보여준다.

성신 대제는 5년마다 중제를 지내고, 10년마다 대제를 지냈다. 합포의 수호신격에 대한 제사로서 해상 안전이 가장 중요한 기원의 내용이었다. 200년 전통의 신앙으로 유지되다가 조창의 창저민이 어시장 상인으로 대거 전환되고, 1905년경부터 객주들이 주재하는 어시장 축제로 전환되면서 풍어와 해상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되었다.

즉, 석두창에서 마산창에 이르기까지 조창은 성신 대제의 형성 기반이 되었다. 고려 시대 정동행성의 설치와 그로 인한 뱃길의 수난, 삼별초의 해안 침입, 왜구들의 식량 조달을 위한 조창의 습격, 조운선의 운항에서 겪게 되는 생명의 위협 등 바다는 지역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삶의 조건에서 조창 관리와 마산포 주민은 공동제의인 성신 대제를 제도화한 것이다.

2. 마산항의 개항과 시장제로서의 성신 대제

1894년 마산창이 폐지됨으로써 성신 대제는 전승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조창이 폐지된 5년 뒤에 마산포는 외국 무역에 개방된다. 마산포창원 감리서가 설치되었고 구조창 전운사 아문(舊漕倉轉運使衙門)이 감리 아문으로 임명되어 개항 준비를 했다. 조창 유정당은 개항 준비를 위한 집무소가 되었다. 이 과정은 조창의 인적·물적·문화적 자원이 어시장으로 이전되었다. 전승의 기반이 단절되었던 성신 대제는 자연히 마산항을 새로운 기반으로 정비된다.

『마산 일보』 1954년 5월 1일 기사에 “1904년[갑진년]에 돌발한 대폭풍우는 항해는 고사하고 합포 부락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부락민은 성신님의 발작이라 보았다. 신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익년[을사년] 음력 3월 28일 비로서 신주(神住)를 건립하고 신위 제단을 마련하였다. 우연 기적이었는지 항해는 무사했으며 합포만은 어떠한 바다의 침해도 입지 않았다. 부락은 근대적 물질문명의 여적을 입어 도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신 사상은 자손들에게 끊을 수 없는 전통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5년을 두고 중제를, 10년을 두고 대제를 합포가 창원으로부터 독립되고 오늘의 마산으로 이르기까지 통산 무려 300년 204회에 달하는 대제가 면면히 마산 성신 제전의 전통을 자랑하게 되었으니 마산 출신 고노층은 말할 것도 없이 대제전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유단(唯單) 종교적 신념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5년 신주를 설립할 당시의 합포사는 어시장 객주들의 협의 기구였다. 대표 김한영은 환영 수산 대표로서 대제관이 되었다. 이후 1954년의 마지막 대제관은 김한영의 동생 김준영이 계승했다. 김준영 역시 환영 수산을 운영했다. 대제가 단절되고 기제로만 유지되면서 제관은 김용복[수협 중매인], 전삼도[제일 수산 대표], 이천제[수협 중매인], 마산 수협 중매인 협회장으로 계승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삼도가 30년간 성신제를 주제하면서 제사는 거의 개인제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당시 제당은 전삼도의 사무실 위에 있었는데, 제당에는 성신위 목패와 바다에 떠내려 온 장군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들이 성신 대제를 계승한 것은 어시장의 번성과 주민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신 대제는 어시장의 번성과 객주의 등장으로 시장제로 변모하여 부흥되었다. 그러나 시장의 변화와 도시의 발달은 성신 대제를 전체 시민의 축제로 유지하기 어렵게 했고, 현재는 수산물 도매 상들에 의해 기제사처럼 유지되고 있다. 제당은 도매 센터 건물 옥상에 현대식 제당을 설치하여 성신위를 계승하고 있다.

[신격과 제당]

1. 신격

지역민들은 성신제를 별신 장군제, 성숙 대장제 등으로 부른다. ‘별’과 ‘장군’ 신격이 혼재된 모습이다. 성신제의 변화 과정에서 어시장의 객주 집단은 ‘별’을 하늘의 별로 인식하고 ‘별신[星神]’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성신위(星神位)를 목패로 만들어 모시고, 제당의 명칭을 성신 장군 신전(星神將軍神殿)이라 하였다. 축문(祝文)에는 성숙 대장지신(星宿大將之神)으로 명기되어 있다. 어시장 신당의 명칭이나 신전 안에 바다에 떠내려 온 장군상을 모셨다는 데서도 별신과 장군신을 동일하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신격을 별신 장군으로 부른 것은 별개의 신격으로 존재하던 ‘별’과 ‘장군’이 어느 시기에 하나의 신격으로 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시장 신당의 목각 신장이 쉽게 소멸되고 성신위 위패로만 신체를 대신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산제당이 위치한 환주 산성은 고려 시대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정동행성이 있던 곳이다. 1905년 설치된 어시장 신전은 일본의 주길 신사 풍이다. 이들은 모두 바다와 관계된다.

산제당의 신격에 잠재된 장군신이 별신과 합해지면서 별신 장군으로 좌정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제당의 신격과 어시장 제당의 신격이 ‘뱃길의 안전’을 통한 ‘지역민의 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결합된 형태이다. 성신 장군 신전의 형식이 일본의 항해신인 주길 신사 풍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장군신격이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신당

성신 대제의 상당은 자산동 환주산에 위치한 산제당이다. 1933년 이곳에 성덕암이 들어서면서 불교 이외의 기도 행위를 금지했다. 산제당의 절은 지금도 어시장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산령각과 용왕 샘, 목신인 엄나무가 있다. 환주산을 공신산(貢神山) 또는 공신 당산(公神堂山)으로 불렀으며, 지역민들은 지금도 성덕암을 산제당 절이라 부른다. 어선창에 신당을 세우면서 이곳은 완전히 성덕암의 경내가 되었다.

1905년 성신제가 부흥되는 시점에 어시장에 신당이 건립된다. 송석하[1934]와 무라야마 지준[1938]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신당의 모습은 일본의 주길 신사 풍으로 지었다. 일제 강점기와 개항장의 시대적 영향으로 보인다.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 총독부 조사 자료에 의하면, 신전의 내부에는 더욱 작은 신명조의 신묘를 수용해 안에 신위를 봉안하고, 입구는 나무 격자로 된 목책이 있으며 중앙에 전등을 켜놓았다. 외부에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신전 내부는 석회 바닥이며, 외벽과 천정은 판자를 붙였다. 또 신위는 밤나무로 만들었고 위판의 길이는 7치수, 중앙에는 검은 글씨로 성신위(星神位)라 썼고, 푸른 비단 자리를 깔아놓았다.

어시장 신당은 1979년 헐렸고, 그 자리에 수협 중매인 조합 건물이 들어서면서 조합 건물 안으로 제당을 옮겼다. 1992년 구강 매립으로 수협 공판장이 이전하면서 수산물 도매 센터 사무실 502호로 이전하였다. 2002년 건물 옥상에 51㎡ 규모의 현대식 신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용신도를 벽에 설치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