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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03
한자 陶藝-日本傳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웅천 도요지를 경상남도 기념물 제160호로 지정

[정의]

임진왜란 시기 창원[진해구]의 도공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도자기 제조 기술을 전파한 사건.

[배경]

현재 진해의 정골[井谷]에는 조선 시대 도자기를 만들었던 도요지가 있다. 이를 웅천 도요지라고 부른다. 웅천[두동] 도요지는 보배산[해발 478.9m]에서 뻗어 내려오는 구릉에서 북서쪽에 위치하며, 행정 구역상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면 두동리 산 142, 146, 147번지 일대이다.웅천 도요지는 일본에 도예가 전파된 근거지로서 의미를 가진다.

도요토미는 다도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찻잔을 웅천에서 수입해 온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웅천에 있던 왜장에게 지시하여 웅천에서 도예 기술자를 납치하도록 하였다. 도요토미는 조선에서 도예 기술자를 비롯한 세공 기술자, 바느질 잘하는 여인 등을 납치하도록 세 차례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진해[당시 웅천] 정골에서 뛰어난 기능을 가졌던 차관(次貫)이라는 도예 기술자가 끌려갔다. 일본군은 패퇴하면서도 무차별적으로 납치하여 125명의 조선인이 끌려갔다.

[경과]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간 왜장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는 자신의 영지인 북큐슈 나가사키현 히라토섬에 조선 도공들을 집단 거주시키고 ‘고려 마을(高麗町)’이라고 하였다. 마츠라가 무엇보다도 탐한 것은 도예 기술이었다. 마츠라는 찻잔류와 접시류를 만들게 했으나 히라토섬에는 좋은 도토가 없어서 조선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 도공들은 꾸준히 도자기 생산에 매진하여 20년이 지나 조선 백자류와 상회 자기(上繪磁器)[왜칭 錦手]를 구워내고 ‘히라토 나카노도자기’(平戶中野燒)라고 명명하였으며, 널리 호평을 받게 되었다.

도공들의 업적에 만족한 영주는 도공들에게 도토를 찾아 이주하는 자유를 주었다. 도예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현지에 남고 나머지 도공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다소나마 그 행적이 남아 있는 선인은 거관(巨關)[고세키]과 ‘에이(嫛)[또는 ‘이죠(嫛女)]라는 여성이었다.

[거관(巨關)]

일본에서 도토를 찾아 헤매던 웅천 선인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하게 된 곳은 오늘날 나가사키현 사세호시 미카와우찌 마을[長崎縣 佐世保市 三川內町]이었다. 이곳에서 마침내 양질의 도토를 발견하고 합심 협력하여 도자기 공장을 차렸다. 그 결과 명기를 만들어 내게 되어 영주의 어용요가 되었다가 왕실의 어용요로까지 발전하였으며, 그 솜씨는 일본의 왕실과 상류 사회에 회자되었다.

마츠라 영주는 이러한 결과에 만족하여 이들 후손들에게 많은 포상을 하였다. 즉 신분을 무사 계급으로 격상하여 반적에 올리고 거관에게는 이마무라[今村]라는 가명을 부여하였으며, 칼을 차는 것을 허용하고 녹을 높여 1백석을 주고 논밭과 산림을 100여 정이나 주어서 의식주 걱정 없이 도자기 제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리소를 두어서 제도 기술의 누설을 막고 관요로서 보호 육성하였다. 여기서 번창한 도자기 산업은 점차 퍼져나가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1977년 이 도자기를 전통 공예품으로 지정하였다. 그 뒤 국가적 지원 아래 회관 건립이 추진되어 1982년 개관하였다.

[이죠(嫛女)]

히라토섬에서 흩어진 웅천 선인들 가운데 유독 일본인들이 ‘에이’라고 부르는 여인은 도토를 찾아 사가현 가라즈령의 시이노미네로 옮겨 도자기를 만들었다. 강제로 결혼하였던 남편과 사별한 에이는 아들을 데리고 적지를 찾아 나섰고, 다다른 곳은 현재의 사세호시 미가와우찌 마을 나가히산이었다. 여기서 에이는 조선 백자를 닮은 그릇을 만들어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1622년 고려 찻잔과 말차 찻잔을 창도하고 회색 유약도 발명하였다. 에이는 이곳에서 도예에 종사하면서 뒷산 등을 ‘삼포’라고 명명하고 사당을 지어 ‘니미네 사당’이라고 부르며 춘추로 제향을 올렸다. 1637년 영주는 명을 내려 다른 곳에 있는 도공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하고 에이에게 협력하게 하니 도공들은 에이를 부모처럼 따르고 사사하며 협조하여 도업은 나날이 번창하였다.

에이가 창도한 자기는 당시 일본 정부에 진상을 하는 그 지방 명물이 되었고 황실에서도 애용하는 도예품이 되면서 그 명성은 일본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왜적에게 납치되어 수모와 향수를 견뎌내며 조선의 도예 기술을 일본에 심은 결과 드디어 도조가 되었다. 이름도 모르는 웅천의 여인은 노경에 들어 ‘고오라이바바[高麗媼, 한국에서 온 할머니라는 의미]로 불리다가 1672년 106세의 고령으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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