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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05
한자 鎭海-烽燧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정용

[정의]

조선 시대 진해 지역에서 주로 정치 군사적인 국가 안보의 목적으로 운용된 통신 제도.

[개설]

봉수(烽燧)는 횃불과 연기로 지방과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국왕에게 신속히 전달하기 위하여 마련한 통신 제도이며, 주로 정치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 운영되었다.

[진해의 봉수]

기록상 봉수제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 이후인데 조선 시대 진해 지역의 봉수로는 고산 봉수(高山烽燧)장복산 봉수(長福山烽燧) 그리고 사화랑 봉수(沙火郞烽燧)와 성산 봉수(城山烽燧) 등 4개의 간봉(間烽)이 있었다. 현재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들 봉수(烽燧)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산 봉수지(高山烽燧址)는 고산(高山)에 소재하는데 진해 현동(縣洞) 산 2번지이다. 고산 봉수는 진해의 서쪽 외곽과 창원시 귀산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해발 400.4m인 고산의 정상부 가로 23m, 세로 21m의 범위에 해당한다. 이 고산 봉수는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이르는 조선 시대 봉수 체계의 제2거의 간봉이다. 현재 고산 봉수지는 군사 보호 구역 내 초소로 활용되어 온 관계로 본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연해와 변경의 매봉화대에는 봉화대 근처의 거주인으로 군사 10인과 오장 2인이 임명, 배치되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봉수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봉화대에는 표주를 세워서 경계를 설정하였다. 거짓 봉화를 올렸을 때나 봉수대의 100보 이내에서 단순한 방화가 일어나면 병조에서 관할하고, 방화가 100보 밖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관할 진영에서 단속하였는데 대개 사형에 처했다. 아울러 봉화대 근처에서는 무당이나 토속적인 잡신 제사를 금했는데 봉수가 갖는 국가 안보상의 특수함 때문에 처벌과 단속이 강화되었다.

『웅천 읍지(熊川邑誌)』에 따르면 고산봉수의 봉수 군보(烽燧軍保)는 군인 25명과 보인 75명으로 모두 100명이 소속되었다. 현동 뒷산인 고산의 정상에 있었으며 동쪽의 사화랑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북쪽 창원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로 전달하였다. 장복산 봉수가 폐지되기 전에는 동쪽의 장복산 봉수, 남쪽의 창원 여음포 봉수(餘音浦烽燧), 서쪽의 창원 성황당 봉수에 응하였다. 1894년(고종 31) 팔로(八路)의 봉수를 폐지할 때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장복산 봉수지(長福山烽燧址)이다. 진해 여좌동장복산(長福山)에 소재한다. 장복산 봉수는 진해와 창원의 경계부에 있는 장복산의 고봉에 위치하여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에 이르는 제2거의 간봉(間烽)이다.

『동국 여지지』와 『여지도서』에 따르면 장복산 봉수장복산에 있었으며 동쪽의 사화랑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서쪽의 고산 봉수로 전달하였다. 고산 봉수가 설치된 후 그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성산 봉수(城山烽燧)인데 성산 봉수는 1506년에 가덕도 봉수(加德島烽燧)를 웅천현으로 옮겨왔다. 가덕도 봉수는 동쪽으로 김해부의 성화례산 봉수(省火禮山烽燧)에 응하고 서쪽으로 사화랑산 봉수에 응하였다. 성산 봉수와 장복산 봉수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사화랑 봉수지(沙火郞烽燧址)이다. 사화랑 봉수(沙火郞烽燧)진해 죽곡동 산 103-2번지명동 산 7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사화랑산에 소재한다. 사화랑 봉수는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에 이르는 제2거의 간봉이다. 사화랑 봉수지는 그 형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는 유적지이다. 남북향(南北向)으로 남-북간 36~40m, 동-서간 15~20m정도의 규모이다. 방형의 외곽(外廓)은 2겹의 석축렬(石築列)이 돌려져 있고 남서벽(南西壁)은 다소 무너져 있으며 동(東) 장벽의 양 모서리부에는 각 1곳씩 2개소의 문지(門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봉수지의 내부는 소나무 등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중앙부에는 동서로 돌을 쌓아 전체를 2부분으로 구획하였다.

『웅천 읍지』, 『동국 여지지』에 따르면 사화랑 봉수의 봉수군보는 100명이었다. 명동 뒷산인 사화랑산의 정상 아래 소봉우리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동쪽 가덕도(加德島)의 천성 연대 봉수(天城烟臺烽燧)의 신호를 받아서 서쪽의 창원 여음포 봉수(餘音浦烽燧)와 장복산 봉수(長福山烽燧)로 전달하였다. 1894년(고종 31) 팔로(八路)의 봉수(烽燧)가 폐지될 때 함께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봉수는 특히 국가안보상의 목적으로 운영되는 정보 전달 장치이다. 진해 지역의 특수성 즉 일본과 가깝고 해안을 끼고 있는 최일선 전략지라는 지리적 특성은 외적의 침입을 신속히 전달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격퇴해야 할 군사적 체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 하나의 방안이 봉수 제도로 구체화된 것이다. 진해의 봉수는 왕조시대 영토를 수호하고자 하는 국가적 의지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일제가 주도하는 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외세에 의해 혁파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안보의 측면을 재삼 상기하게 하는 역사의 교훈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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