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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07
한자 薺浦開港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정용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제포(薺浦)를 1407년(태종 7)부터 1541년(중종 36)까지 기간 동안 왜인들에 대한 교린과 통제 정책의 하나로 개항(開港)한 사건.

[개설]

태종은 1407년 다른 포구에는 왜선의 정박을 금지하고 경상좌우도의 도만호가 주둔하는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薺浦]와 동래의 부산포(富山浦)를 개방하게 하였는데, 이로써 제포(薺浦)가 개항(開港)되었다. 그 후 1418년(태종 18)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해 이곳에만 왜선들이 정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1419(세종 1)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되었다. 그 뒤 대마도 도주(島主)인 종정성(宗貞盛)[都都熊丸]의 간청으로 1423년에는 부산포와 내이포, 1426년에는 염포에 왜인의 내왕을 허가해 제포, 부산포, 염포의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해상과 해안가를 이용한 왜구들의 약탈과 해안 지역 주민들에 대한 피해가 계속되었으며 조선 정부 차원에서 왜인들의 불법적인 행태들을 엄격히 단속하면서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상거래를 허용하여 아무 곳에서나 무질서하게 정박하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개항 이후]

삼포가 개항된 초기부터 왜관을 중심으로 왜인과 조선 상인 사이에 무역이 행해졌으며, 조선 전기에는 입국하는 왜인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1439년 한 해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성종 때에도 왜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왜관이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제포를 비롯한 삼포는 점차 항만 도시로 발전하였다. 삼포의 왜관 주변에 상주하는 왜인들은 일본 상선이 입항할 때 상행위를 하거나 근해 어업에 종사하였다.

또 부근의 공사전(公私田)을 입수하여 경작하기도 했으며, 밀무역의 중개자 노릇도 하였다. 대마도주는 대관(代官)을 시켜 이들을 지배했고 이들에게 면포(綿布) 등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왜관이 있던 제포[내이포]는 일본과 오가는 주된 통로로 창원과 접한 곳이면서 대마도의 상선들도 많이 드나들던 곳이다. 왜인들이 많이 출입하고 그들의 배가 정박하는 동안 왜인에 대한 물자 공급을 맡은 인근 고을들은 특히 농사철에 많은 폐단을 겪어야 했다. 창원도 직접 그 폐해를 받는 지역이었다. 세종 당시 내이포에는 장사하는 왜인 60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창원은 내이포에서 서울로 가는 주된 통행로였다.

문종 당시에는 내이포·부산포·염포 등지에 사는 왜인들이 2,000여 명이었고, 세조 연간에도 제포[내이포]에는 92호수에 416명의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늙고 약한 자를 제외하면 건장한 자가 114명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명을 띠고 와서 제포에 머물러 있는 자가 2,011명이었으며 장사치도 많아서 이들을 모두 계산하면 상주 왜인은 수천 명에 달하고 있었다. 1430년(성종 12)에는 제포에 308호수에 1,722명의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개항 후 폐해]

개항지인 제포에서 활동한 상주 왜인의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에 의한 폐단들도 끊이지 않았다.

내이포 등지에 상주하고 있는 왜인의 규모와 위협적인 형세로 인해 혹시 이들이 변란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혹은 만약 뜻밖의 일이 생겨 이들이 해상과 육지에서 함께 들고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늘 우려되고 있었다. 또한 왜인과 왜적은 구분해야 하지만 이들의 구분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고, 바다 연변에는 주민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들이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노략질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왜구들은 옷을 바꾸고 말씨를 바꾸어 여러 고을로 횡행하면서 전횡을 일삼았고, 결국 1510년(중종 5)에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 그간의 우려가 삼포왜란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삼포왜란 때 살해된 사람은 272명, 소실된 가옥은 796채였다. 왜인들의 거점이었던 내이포[제포]와 인근 창원부의 주민들은 삼포왜란의 중심부에 있었다.

[변천]

조선 정부는 삼포왜란을 진압한 뒤 삼포를 폐쇄하고 통교를 단절하였다. 1512년(중종 7) 임신조약으로 인해 국교를 회복하였을 당시 처음에는 제포만을 개항하였다가 이후 부산포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1541년(중종 36) 제포에서 조선의 관병과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를 폐쇄하고 제포진을 만호진으로 강등시키고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을 내쫓고 왜관은 부산포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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