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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022
한자 崔致遠
이칭/별칭 고운(孤雲),해운(海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57년연표보기 - 최치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868년 - 최치원 당나라 유학
활동 시기/일시 874년 - 최치원 당나라 빈공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885년 - 최치원 신라로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894년 - 최치원 시무책 상소
추모 시기/일시 1021년 - 최치원 문창후 시호, 문묘 배향
출생지 최치원 출생지 - 경주 사량부
거주|이주지 청량사 - 경상남도 합천군
거주|이주지 쌍계사 - 경상남도 하동군
거주|이주지 해운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거주|이주지 월영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거주|이주지 해인사 - 경상남도 합천군
수학|강학지 당나라 - 당나라
사당|배향지 무성 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사당|배향지 서악 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사당|배향지 백연 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성격 문장가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당나라의 선주 표수현위|당나라의 고병(高騈)의 종사관|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대산군태수|천령군태수|부성군태수

[정의]

통일 신라 말기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문장가.

[가계]

본관은 경주. 세계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최견일(崔肩逸)인데, 신라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활동 사항]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정치 개혁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79년 당나라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유명한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명문으로 이름을 높였다. 당나라에 머무는 17년 동안 고운(顧雲)과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과 사귀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당나라에서의 정치적,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885년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서 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889년(진성왕 3)에 농민들이 봉기하여 나라가 내란에 휩싸이는 상황이 되자 진골 귀족 중심의 신분적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경주를 떠나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890년부터 태산군[전라북도 태인], 천령군[경상남도 함양], 부성군[충청남도 서산] 등지에서 지방관을 지내면서 신라의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894년 시무책 10여조를 진성 여왕에게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중앙 진골 귀족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시무책의 내용은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당나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내용이 담겨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능력 있는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제의 시행, 백성들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 정책 등이 개혁안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진성 여왕이 시무책을 받아들여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 올랐으나 최치원의 정치 개혁안은 진골 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진골 중심의 사회체제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여 경주를 떠나 유랑하고 은거하였다. 해인사에 은거하기 전에 합포현[창원시 마산합포구]에 별서(別墅)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최치원이 새겼다는 ‘월영대(月影臺)’가 그것이다. 진해구 가주동에도 최치원이 낚시를 즐기던 장소라고 전하는 곳에 친필로 추정되는 ‘청룡대(靑龍臺)’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최치원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 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따르면 908년(효공왕 12)까지는 생존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걸출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당나라의 학자가 아니면서 그의 이름과 저서가 『당서 예문지(唐書藝文志)』에 실린 것은 그이 문학적 자질이 뛰어났음을 잘 보여준다. 고려 시대의 이규보가 “『당서(唐書)』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실리지 않은 것을 두고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문장이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이름난 문인이었던 고운(顧雲)은 최치원이 귀국길에 오르자 문장을 높이 칭송하는 시를 지어 송별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문학적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유학자이지만 유교 뿐만 아니라 불교나 노장사상, 풍수지리설의 대가이기도 했으며, 시문집으로 보아 대단한 문장가였으며, 역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시문집으로는 『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불교 관련 저술로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다. 저서 중에서 『계원필경(桂苑筆耕)』,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사산비명(四山碑銘)』만이 현전하며, 시문 약간과 기(記), 원문(願文), 찬(讚) 등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1020년(고려 현종 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1021년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를 얻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 태인의 무성 서원, 경주의 서악 서원, 함양의 백연 서원, 영평의 고운 영당, 대구 해안현의 계림사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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