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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12
한자 昌信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인가 시기/일시 1909년 10월연표보기 - 창신 학교 명의 인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12년연표보기 - 사립 의신 학교 설립
최초 설립지 사숙(私塾)을 설치 - 성호리(城湖里)
성격 학교

[정의]

개항기 마산 성호리 지역에 있었던 교육 기관.

[변천]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미손회(會)의 파견 선교사 아담슨이 일찍이 본국에 청원하여 매달 금화 십 원의 보조를 받아 성호리 구 예배당[현 마산야학교] 사무실에 사숙(私塾)을 설치하고 학생 20여 인을 모집하여 이승규(李昇奎)가 숙장(塾長)으로 구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7월 경성 정동 교회 고(故) 남승(南昇)을 초청해 학교제도를 고쳐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학생 수는 남녀 60여 명에 달하였다.

1908년 10월경에 이승규, 김지관(金志觀) 등이 동교 여학생 이희(李喜), 박봉학(朴鳳學), 김의옥(金義玉) 3명을 대동하고 부산, 동래, 양산, 통영 등지를 돌면서 모은 기부금 2백여 원을 기본금으로 하고 다시 이승규가 기부한 밭 10두락(斗落)과 유성일(愈聖逸)에게 사들인 밭 6두락을 기본으로 70여 평, 2천3백여 원으로 학교를 건축하였다. 부족액은 이승규가 2백50원, 지역의 인사 및 교회에서 기부한 금 9백여 원과 이승규의 소유인 가옥을 저당 잡혀 마련한 1천 원으로 채웠다.

1909년 8월에 창신 학교 명의를 인가받고 1911년 10월에 손덕우(孫德宇), 이상소(李相召), 이규철(李圭哲), 이승규 4명이 발의하고 김병선(金秉先), 정태오(鄭泰午), 홍재갑(洪在甲), 옥기환(玉麒煥), 황갑주(黃甲周), 한태연(韓泰連) 등의 찬성으로 1921년 고등과 교실 50여 평을 건축하고 1912년에 사립 의신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호주 미손회(會)에서 매월 금화 50원의 보조를 받아 본 창신교를 유지하였다. 1916년부터 고등과는 미손회(會)에서 경비를 전부 부담하고 유지하였고 초등과는 학부형 및 교회와 유지의 의연금(義捐金)으로 유지하였다.

[교육 활동]

마산 지역의 3·1 운동은 다른 도시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학교 조직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임학찬(任學讚), 김용환, 이형재 등 창신 학교, 노동 야학교 교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지도 그룹을 이루었고, 창신 학교, 의신 여학교, 마산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투쟁을 전개하고, 이어서 광범한 대중이 참여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김용환, 이정찬(李廷讚), 박순천(朴順天) 등 48명이 투옥되고 창신 학교와 의신 여학교, 마산 공립 보통학교는 휴교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처럼 창신 학교는 의신 여학교, 마산 노동 야학교, 마산 부인 야학교와 같이 조선인 자본가들과 기독교단에서 세운 사립학교는 무단 통치라는 혹한 속에서도 민족의식의 숨결을 보존, 육성하는 터전이었다.

[현황]

창신 학교 졸업생 중에는 이정찬(李廷讚), 팽삼진(彭三辰) 등이 있는데 팽삼진창신 학교 고등과 학생으로 3·1 운동 주도하였다. 창신 학교의 선생님으로는 손덕우(孫德宇)[부교장], 손문기(孫汶岐), 이윤재(李允宰), 이주만(李周萬) 등이 있었다.

1921년 학생 수는 초등과 340명, 고등과 154명 합 494명이고 교사는 고등과에서 6인 초등과에서 6인 합 12인이며 졸업생은 초등과 11회 184명, 고등과 5회 38명 합 222명에 달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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