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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상곡리 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68
한자 馬山上谷里西臺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이원순의 우국충절정신을 기리는 내용
소재지 마산 상곡리 서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지도보기
성격 조선 고종의 죽음을 애도했던 이원순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대(臺)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조선 고종의 죽음을 애도했던 이원순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대(臺).

[개설]

상곡 마을에 살았던 이원순이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곡을 하던 곳에 기념하기 위하여 1937년 정월에 기념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서대이다. 이원순은 자가 도여, 호는 소여라고 하며 조선 시대 말 1863년(철종 14)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래 고종의 승하 때까지 나라 잃은 한을 못이겨 오랫동안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특히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실성할 정도로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 정신을 기리고자 하여 아들인 이상화(李相華)가 대(臺)를 쌓고 비를 세웠다.

‘서대’의 뜻은 송나라 충신이던 사고(謝翶)란 사람이 망국의 한을 생각하면 통곡한 곳에서 따온 것이다. 그곳은 서호와 항주로 유명한 절강성 동려현 부춘산에 있는 이름난 낚시터로서 동대와 서대가 있으며, 이중 서대가 바로 사고가 올랐다는 곳이다. 사고가 지은 ‘등서대통곡기(登西臺慟哭記)’는 이후 망국을 상징하는 시로 잘 알려져 있다.

서대가 세워진 1937년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한반도에 대한 통치가 강고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서대를 세운 것은 이 지역사람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서대기를 쓴 사람은 김병린(金柄璘)[1861~1940] 선생인데, 이원순의 아들인 이상화가 당시 창원군 동면 화양리 곡목에 살던 선생에게 글을 부탁했다. 김병린 선생은 당시 지역 사회에서 유학자로 서당을 열어 교육을 하고 또 항일우국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서대기’에 따르면 김병린 선생은 평소 이원순 선생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서대기를 새긴 사람은 김병화(金柄華) 선생이다.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상곡리 14-1번지에 있는 읍산재(揖山齋) 뒤에 있다.

[현황]

서대는 둥근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무릎 높이의 돌에 ‘서대(西臺)’란 글자를 새겼으며, 돌의 모양은 일반적인 비석모양이다. 그 옆에 비석을 세운 경위를 적어 놓은 서대기 비석이 있다. 비석의 모양은 등을 굽혀 절하는, 혹은 곡을 하는 형상이다. 자연석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이런 형상의 돌을 선정하거나 혹은 일부를 현재의 모양으로 깎았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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