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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73
한자 朱基徹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주기철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26년 12월 - 주기철 목사 안수
활동 시기/일시 1938~1944년 - 주기철 신사참배 거부 운동 시작|종료
몰년 시기/일시 1944년 4월 21일연표보기 - 주기철 사망
출생지 주기철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 1동
학교|수학지 주기철 수학지 - 평양 오산 학교
학교|수학지 주기철 수학지 - 서울 연희 전문대학교
학교|수학지 주기철 수학지 - 평양 장로회 신학교
활동지 부산 초량 교회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1동 1005
활동지 마산 문창 교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57 지도보기
성격 일제 강점기 목사|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부산 초량 교회 목사|마산 문창 교회 목사|평양 산정현 교회 목사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 출신의 목사·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주기철(朱基徹)[1897~1944]은 3·1 운동 이후인 1920년부터 ‘종교’와 ‘목회’ 쪽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경남노회의 추천을 받아 1922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경상남도 양산읍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 훈련을 받았지만 민족주의 계몽의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 재학시절 기독교계 계몽잡지 『신생명』에 기고한 「기독교와 여자해방」이라는 글에서도 확인된다. “여자 해방은 기독교에서 나왔으며 기독교는 여자해방의 선구자”라 하여 1920년대 사회적 관심사의 하나였던 ‘여자 해방’ 문제에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26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초량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그해 12월에는 제20회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로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마산 문창 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6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교회의 조직과 체계를 재정비하였고, 경남노회장이 되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 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평양에서도 주기철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래서 교계 잡지나 신문에 설교문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후 주기철 목사는 평양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는 그의 수난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38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일어난 ‘기념식수 훼손 사건’은 당시 평북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이 학교 학생이 1934년 졸업 기념으로 노회장이 교내에 심었던 나무를 뽑아 버린 일이었다. 주기철은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평양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27일 만에 석방되었다.

1938년 5~6월 일본 기독교 연맹 의장 도미타를 비롯한 일본 기독교계 대표단이 한국으로 와서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한국 교계 지도자들을 회유하고 설득하였다. 6월 30일에는 산정현 교회에서 간담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격렬한 말로 신사참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1938년 8월 경상북도 의성에서 터진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간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가 의성경찰서에 붙잡혀 있었던 1938년 9월초 그가 속한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9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개최된 27차 총회에서도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1939년 2월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이에 1939년 9월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교계인사들과 함께 평양 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었다. 목사가 억류되어 있는 동안 평양 경찰서는 평양 노회의 임원을 회유하여 산정현 교회를 폐쇄하고 그의 가족을 사택에서 쫓아냈다.

이후 1940년 4월 일시 석방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지도자들의 비밀회합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방별로 지속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추진할 것과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회나 노회를 대체할 기구를 재건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40년 6월부터 20여명이 넘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들이 검속되었을 때 그도 다시 구금되었다.

1940년 여름에 평양 경찰서에서 고문과 악형을 받은 후 1년 만인 1941년 8월 25일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전향만 하면 석방하겠다”는 유혹을 거부하고 옥중 투쟁을 하다가 병감으로 옮겨진 1주일 만인 1944년 4월 21일 옥사하였다.

[사상과 저술]

신사참배를 거부한 행위는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행위는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의 성격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신사참배 반대세력은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과 양심으로 정의롭지 않은 정치권력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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