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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5198
한자 李敎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7월 9일연표보기 - 이교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교재 대구 형무소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이교재 상해 임시정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이교재 마산 교도소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이교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33년 2월 14일연표보기 - 이교재 사망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이교재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이교재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이교재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교재 거주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묘소 이교재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상해 임시정부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교재(李敎載)[1887~1933]는 3·1 운동 때는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진주에서 붙잡혀,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처음으로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한 뒤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으로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23년 9월 21일 체포되어 마산 교도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다시 감옥에서 나온 후 국내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해로 되돌아 가다가 신의주 국경에서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세 번째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상해 임시정부로 복귀했고, 또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고학생들로 구성된 ‘칼톱회’를 조직하여 그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 주었다. 1931년 다시 국내 상황 보고를 위해 상해로 돌아갔고, 그해 11월 20일,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장 백범 김구와 내무장 조완구로부터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 대표 직위를 위임받았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주, 대구, 창녕 등지로 다녔다. 그러다 마산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부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후 당했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강제 출소시켰다. 풀려난 지 10여일만인 1933년 2월 14일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 일제는 선생의 형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그의 묘소에 철책을 두르기도 하였다.

독립 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김구 선생의 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교재 선생은 학자고 선비입니다. 인격이 매우 고매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시며 정의감과 애국심이 투철하신 분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중략]독립운동자금을 보내오고 연락이 자주 오다가 그만 연락이 끊겼습니다. 미처 조국의 광복을 못 보시고 순국하였으니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8·15 해방 당시 선생의 묘소는 매우 초라했다. 1954년 마산 일보의 사장이었던 김형윤이교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회를 만들어, 지역유지와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현 위치로 묘소를 옮겼다. 새로 세운 선생의 묘비에는 그의 의로운 투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요

기 꺾일 줄 있으랴만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선생의 묘소에 이르는 길은 죽헌로로 명명되어 이교재의 항일구국투쟁 정신을 기념하고 있다.

[묘소]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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