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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031
한자 阮堂法帖曺訥人幷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원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0년 10월 14일연표보기 - 완당법첩조눌인병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1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완당법첩조눌인병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6년 1월 24일 - 완당법첩조눌인병서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받아 보관
현 소장처 경남 대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지도보기
출토|발견지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 - 山口県山口市 桜畠 3-2-1
성격 필사본
작가 김정희|조광진
소유자 한마 학원
관리자 경남 대학교 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서첩(書帖).

[개설]

완당법첩조눌인병서(阮堂法帖曺訥人幷書)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초대 통감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재임 기간에 수집했던 자료로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 도서관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에 소장되어 있었다. 경남 대학교는 1996년 98종 136점의 조선 관계 자료를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완당법첩조눌인병서도 그 중 1종이다. 2010년 10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1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완당법첩조눌인병서의 크기는 38㎝×24㎝이며 전체 분량은 24쪽이다. 완당법첩조눌인병서는 말 그대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의 글씨가 함께 실려 있는 서첩으로 보관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완당법첩조눌인병서김정희의 시와 조광진이 쓴 묵서(墨書)를 싣고 있다. ‘완당’은 추사(秋史) 김정희의 또 다른 별호이다.

김정희의 시는 「사언시(四言詩)」를 행서(行書)로 쓴 작품과 「해우사백에게 주다[謹呈 海右詞伯 玉拂]」라는 시 2편이 있다. 「사언시」는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약간 비스듬하게 썼다. 시의 제명(題名)을 ‘수미승인(須眉勝人)’이라고 썼는데, 곧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해우사백에게 주다」는 김정희가 중국 남조 시대(南朝時代)의 제(濟)나라 도홍경(陶弘景)[456~536]이 지은 오언절구를 행서로 써서 ‘해우사백’에게 준 작품이다. 시의 맨 끝에 ‘패상연우중(貝上煙雨中)’이란 말이 나오는데 곧, ‘패수(貝水)[지금의 대동강] 위에서 안개비 내리는 가운데’ 라는 뜻이다.

조광진의 글씨는 예서(隸書)로 쓴 ‘석철신신(昔徹神神)’이라는 글씨와 전서(篆書)로 쓴 ‘묵연(墨緣)’이라는 글씨를 싣고 있다. ‘석철신신’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감철신명(感徹神明)[신명도 감격하였네]’, 또는 ‘관철신명(貫徹神明)[신명도 통하였네]’ 등의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묵연’은 ‘묵(墨)으로 맺은 인연’이라는 뜻인데 끝에 “이는 서경의 고법이므로 인하여 썼다.[此是西京古法 仍書]”라고 하였다. ‘서경’은 한(前漢)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나라의 예를 따라 썼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조광진의 본관은 용담(龍潭)이고 자는 정보(正甫)이며 눌인(訥人)은 그의 호인데, 구눌(口訥)이라고도 하였다. ‘눌인’, ‘구눌’은 ‘어눌한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아마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스스로 이런 별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광진유한지(兪漢芝)[1760~1834],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예서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글씨를 배웠다. 처음에는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글씨를 배웠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예서는 청(淸)나라 장도악(張道渥)을 따랐다고 한다. 조광진신위(申緯)[1769~1845], 김정희와 가깝게 지냈는데 김정희조광진의 서체에 대해 "창아기발(蒼雅奇拔)하고 괴위정특(怪偉挺特)하니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칭찬했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눌인서첩(訥人書帖)』 등이 있으며, 「근묵(槿墨)」·「근역서휘(槿域書彙)」 등에 그의 글이 전한다. 유명한 평양 부벽루(浮碧樓)의 현판 글씨도 조광진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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