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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21
한자 鎭海薺浦鎭城
이칭/별칭 제포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830|83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주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86년연표보기 - 진해 제포진성 축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진해 제포진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
현 소재지 진해 제포진성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830|831지도보기
성격 유적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

[개설]

진해 제포진성의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몇몇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포진성(薺浦鎭城)이 아니라 제포성(薺浦城)이라 지칭하고 있으며 제덕토성과 혼동되기도 하는 등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논의 또한 복잡하다. 진해 제포진성이 처음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좀 더 명확한 자료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1437년(세종 19) 진을 설치하였지만 진성은 축성되지 않았고, 연변(沿邊)에 창고 시설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84년(성종 15) 집의(執義) 조숙기(曺淑沂)제포를 포함하여 전라도·경상도 연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러면 왜인들이 놀랄 수 있고, 각 포에 성을 쌓으면 수군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 육지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성종은 적극적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 17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이 달에 경상도 제포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4,316척 3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진해 제포진성의 규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웅천현 읍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진해 제포진성은 축성 당시 4,313척[측정 결과 1,377m]으로, 웅천 읍성[3,514척] 보다 1.23배가량 큰 석성(石城)이었다. 다만 지금은 성체를 볼 수 없으며, 동문지와 해자, 남쪽 축대와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진해 제포진성 내에는 남아 있는 건축물이 없지만, 읍지에 의하면 축성 당시와 이후 성내에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의 『지방지도』 경상도 부분의 「웅천현 지도」와 「제포진 지도」이다. 「제포진 지도」에 의하면 진해 제포진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내아·이청·문루·신당·사령청·포수청·화포청·사공청·장교청·창고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웅천현 읍지』에 의하면 성내에 우물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성 내외 주변 지역에서는 백자와 기와편이 다수 출토된다.

성외 시설로는 어변정(禦邊亭)이 있었다. 어변정은 수군의 무기고로서 『웅천현 읍지』에 따르면 웅천현 읍성에서 4리 떨어진 제포 해변에 있었다. 어변정 인근 해변에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치]

진해 제포진성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830과 831 일대에 있다.

[형태]

진해 제포진성은 총 연장 1,377m, 폭 4.5m, 높이 2m 내외의 평산성이다. 제덕동 안지개 마을의 낮은 야산 서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까지 축조하였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이중 기단을 조성하였으며, 동쪽·서쪽·북쪽에는 옹성형(甕城形)의 문지가 있다. 성벽 곳곳에 곡성(曲城)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깊이 5m 내외, 폭 5~9m 내외의 해자(垓字)를 둘렀다.

2009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는 동벽 해자 바깥 인접한 지역에서 성토부가 확인되었다. 전체 너비 10.8~11.8m, 높이 1.9~3.3m 규모이다. 황갈색 풍화 암반토와 적갈색 점질토, 황갈색 풍화 암반토를 번갈아 다졌는데 안쪽은 10~12°의 경사로 성토하였고, 바깥쪽은 25~50°의 경사로 성토하였다.

[현황]

진해 제포진성의 안쪽은 2013년 현재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고, 정상부에는 1980년에 지어진 한국 통신 공사[현 KT] 건축물이 남아 있다. 2002년에 마을 진입 도로 확장 사업으로 인해 북쪽 지역의 성벽이 일부 제거되었으며, 최근에는 진입 도로 확장을 위해 체성부와 성내 일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현재는 남쪽 정상부의 건물지 석축 일부와 서쪽 문지 및 동쪽 문지를 제외하면 성의 기초만 잔존한 상태이다.

진해 제포진성은 본래 조선 초 개항을 목적으로 축조되었으나, 1510년(중종 5) 발생한 삼포 왜란을 계기로 병영성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성곽이 크게 훼손된 것은 인접한 곳에 있는 웅천읍성과 남산왜성을 수축하면서 진해 제포진성의 석재를 이용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제포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개항지이다.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으로 표현되는 조선의 외교에서 교린 정책이 실현되었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여 군대가 주둔하고 방어 시설을 갖추는 등 군사적 성격 또한 부가되었다. 즉 진해 제포진성은 조선의 외교와 국방 정책이 중첩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