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진해 제덕토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26
한자 鎭海濟德土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산17-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주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진해 제덕토성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산17-2 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토성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걸쳐 있는 조선 시대 토성.

[개설]

진해 제덕토성은 웅신 고개에서 제덕산 능선으로 이어진 토성이다. 제덕토성의 축성 연대와 축성 목적을 정확하게 언급한 문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 시대 초기 내이포를 개항한 뒤 왜관을 두어 항시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60명으로 제한하였고, 일반적으로 왜관의 외부에 목책을 두르고 다시 밖에 성을 쌓아 일반 주민들과의 접촉을 차단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에 1438년(세종 20) 1월 7일 “왜인이 식량을 더 타지 못하게 하는 방책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455년(세조 1) 7월 22일에는 “우참찬 황수신이 『경상도 지도』·『웅천현도』를 올리고, 웅천 축성을 청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같은 해 경상우도 절제사가 지금의 웅동 쪽에 성보를 쌓는 것을 건의하며 “제포에 왜인이 2,011명이나 머물고 있어서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의 산등성이로부터 서쪽으로 만호영 앞까지, 동쪽으로는 웅포까지 성을 쌓고 얕은 곳에는 목책을 세우고 이어서 관문을 세워서 웅천의 군사 20~30명으로 하여금 파수를 보게 하는 등 밤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낮에는 열어 출입을 절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위의 기록들은 발굴 조사 결과 및 현재 잔존한 토성의 범위와 일치하고 있어 토성축조는 1455년경에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록에 따르면 1507년(중종 2) 삼포에 축성하기 위하여 성기(城基)를 측량하자 거류하던 왜인이 축성을 중지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병조와 축성도감에서 상의한 일이 있으므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위치]

진해 제덕토성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산17-2 일대에 위치한다.

[형태]

왜관지 북쪽의 정선부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삭토하거나 성토하여 경사지게 하여 성벽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토성의 규모는 길이 340m, 높이 3.5m 정도이이고, 성벽 기단부는 5m 정도이다.

[현황]

진해 제덕토성제포진성의 동쪽 끝부터 야산 정상부로부터 능선을 따라 웅신현을 가로질러 능선을 따라 웅포의 하천 쪽으로 연결된다.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남문 지구 조성 사업 부지 내 문화재 발굴 조사를 통해 약 82m 정도 구간이 조사되었는데 너비 3~3.6m, 높이 0.5~1.3m 규모로 잔존해 있다. 토성은 기반암 위에 축조되었으며 외벽에 2~3열의 석렬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기단에 석축한 판축 토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