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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230
한자 昌原熊川邑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남문동|서중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주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28일연표보기 - 창원 웅천읍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창원 웅천읍성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건립 시기/일시 1435년연표보기 - 진해 웅천읍성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453년 - 진해 웅천읍성 체성 증축 및 해자 조성
현 소재지 웅천읍성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남문동|서중동
성격 성터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남문동서중동에 걸쳐 있는 조선 시대 웅천현(熊川縣)의 읍성 터.

[개설]

창원 웅천읍성 설치의 주요한 이유는 읍성 남쪽 제포 왜관에 상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의 세력이 급증하자 이들의 준동(蠢動)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434년(세종 16)에 건립에 착수하여 1435년(세종 17)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1452년(문종 2)에 웅신현·완포현·천읍 부곡이 통합되어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부터 현성으로서 기능하였다.

성내에는 동헌(東軒)·객사(客舍)·장적고(帳籍庫)·향사당(鄕射堂)·인리청(人吏廳)·군관청(軍官廳)·장관청(將官廳)·훈도청(訓導廳)·지인방(知印房)·사령방(使令房) 등이 있었다. 이들 건물 현판에는 교린 정책의 주요 이념이 잘 드러나는데, 동문의 견룡루(見龍樓)·서문의 수호루(睡虎樓)·남문의 진남루(鎭南樓)·객사문루인 정해루(靖海樓) 등이 대표적이다.

[위치]

창원 웅천읍성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남문동·서문동에 걸쳐 있다.

[변천]

『세종 실록』에 따르면 1434년(세종 16)에 김해 읍성과 창원 웅천읍성을 함께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435년(세종 17)에는 창원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서도 1434년에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3(단종 1)에는 체성(體城)을 증축하고 성 밖에 해자를 조성하였고, 1457년(세조 3) 삼도 도순찰사 박강과 부사 구치관 등이 읍성이 협소하여 서쪽에 다시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뒤 1541년(중종 36)에는 성을 증축하고 성 밖의 민가 300여 호를 성내로 옮기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경상도 속찬 지리지』와 『웅천 읍지』에서는 성곽의 둘레가 변동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 시기 증축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 후기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말까지도 웅천 읍성이 읍성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나, 1895년(고종 32) 갑오 개혁을 거치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06년(고종 44)에 주기효에 의해 웅천 사립 개통학교가 개설되고, 1909년(순종 3) 현재 성내동 우체국의 전신인 마천 우편소가 세워지는 등의 과정을 거쳐 성내 건물들이 하나씩 사라지지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도 많이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원 웅천읍성은 웅천 지역의 중심 행정 구역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성안은 ‘성내동’, 남문이 있었던 쪽은 ‘남문동’, 북문이 있었던 쪽은 ‘북부동’, 서문이 있었던 쪽은 ‘서중동’이라는 동명이 붙었다.

[형태]

창원 웅천읍성은 전체 둘레 약 936m[현존 둘레 500m], 폭 4.5m, 높이 4.4m 정도이며, 동벽은 양호한 상태이고 남벽 및 서벽은 후대의 민가, 학교 등의 건축물 설치에 따라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북벽은 국도 개설 시 성벽을 허물었기 때문에 지표상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성벽 기단부는 지하에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축조 상태를 보면 장방형 석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1.8× l.2×1.5m 규모의 자연석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성벽의 네 곳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 모서리부에는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성이다.

[현황]

창원 웅천읍성의 몸체인 체성(體城)은 동벽과 남벽, 서벽의 일부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지만,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보존 상태는 좋지 못하다. 북벽의 경우는 진해-부산 간 국도 2호선이 지나가면서 파괴되어 현재는 그 윤곽을 확인할 길이 없다. 서벽과 남벽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으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한 상황이다. 창원 웅천읍성는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 웅천읍성은 조선 시대 웅천현의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한 치소로서,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성벽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 읍성의 구조적 측면을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조선 정부 교린 정책의 첫 시험지이며, 최전선의 현장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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