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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웅포 해전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6477
한자 鎭海熊浦海戰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3년 2월 10일연표보기|2월 12일|2월 18일|2월 20일|2월 22일|2월 28일|3월 6일 -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포에서 7회 접전
현 소재지 진해 웅포 해전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지도보기
성격 해전지
관련 인물 이순신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있는 임진왜란 시기의 해전 장소.

[개설]

웅포 해전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웅포[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사도 마을 사이의 포구]를 점거하고 있던 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 사이에 접전을 벌인 해전을 일컫는다. 조선 수군이 부산에 진을 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웅포를 점거한 왜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그러나 왜군은 임진년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자 조선 수군에게 대응하지 말고 수성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해상 전투를 피하고 포구의 산기슭에 은거하여 지형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웅포에 함선들을 정박시킨 상태였다.

1593년 1월 조정으로부터 적의 귀로를 차단하여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2월 6일에 함대를 거느리고 전라 좌수영[현재 전라남도 여수시에 소재]을 출발하여 경상남도 통영시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하였다. 이순신의 주도 아래 조선 수군은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모두 7회에 걸쳐 웅포의 왜군을 공격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포구에 깊숙이 정박한 왜선을 모두 섬멸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순신은 온갖 방책을 동원하여 왜선을 큰 바다로 유인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그가 모집하여 거느리고 있는 의병과 각 함대에서 차출한 용감한 군사들을 나누어 웅포 동쪽의 안골포, 서쪽의 제포에 각각 상륙시켜 왜군을 육지의 배후에서 위협하며, 산기슭의 왜군 진지에 우리 함선이 탑재한 중완구(中碗口)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고, 위장 행동으로 왜선을 바다로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여전히 포구에 은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순신은 최후 수단으로 화공으로 왜선들을 불태워버리고자 화선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함선을 상실하여 궁지에 몰린 왜군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화풀이하면 그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화공을 중단하였으며, 4월 3일에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위치]

웅포 해전지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남문동 사도 마을 사이에 있는 웅포에 위치한다. 웅포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웅천읍성에서 큰 길을 따라 동남쪽으로 약 2㎞ 지점에 있다.

[현황]

웅포진해구의 명소인 시루봉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동천웅천읍성을 지나 바다에 닿는 곳에 위치한 포구이다. 포구의 북쪽에 남문동 사도 마을이, 포구의 남쪽에 남문동 와성 마을이 있다. 와성 마을의 남쪽에 있는 남산의 정상에는 왜성 유적이 남아 있다. 남산 왜성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웅포 해전지의 육지쪽은 경남 개발 공사가 2008년부터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남문 지구 개발 사업을 실시하여 동천 하구 개펄이 많이 매립되었다. 웅포 해전지의 바다쪽은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청이 신항만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웅천만 일대에서 매립 공사를 벌여 웅포 포구의 일부 바다를 제외하고 바깥쪽 바다는 매립되었다. 현재 바깥 바다에서 웅포로 들어오는 바다는 일부 출입 항로를 제외하면 모두 매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웅포 해전은 거의 1개월 동안 계속된 해전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치렀던 어느 해전보다도 전투 기간이 길었다. 이것은 이순신이 반드시 웅포의 왜군들을 섬멸한 후 부산포로 진격하여 왜군들과 결전을 벌이고자 하였던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수군은 포구 깊숙이 은거하여 육지와 함선을 기반으로 저항하는 왜군보다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한 여건에서도 왜군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웅포의 왜선 모두를 섬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웅포 해전 후 조선 수군의 부산포 진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웅포 해전지는 포구의 바다와 육지를 포함한 넓은 장소이며, 기념 시설이 없어 일반인들이 유적지로 식별하기 어렵지만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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